[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윤세주(1901. 6. 24~1942. 6. 3) 선생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에서 부친 윤희규(尹熺奎) 선생과 모친 김경이(金卿伊)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 저주할 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열사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국민학교 때 일 왕(日王)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릴 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선생은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同和)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金鴻杓)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했다. 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 그러나 선생의 가슴에 반일, 배일 사상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서울 만세운동(萬歲運動) 참가 후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하오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너의 아버지, 북한에 여러 번 밀파된 것 아냐? 내 선친 남파 김정수 공과 같이 마지막 임시정부 경교장에서 비서를 하시던 오악환 선생께서 나에게 물었다. 너의 아버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이 북한에 여러 번 염탐을 보낸 것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네 내 선친께서 비밀로 해 오던 것을 친구이시며 황해도 고향 아저씨께서 토로해서 알았다. 내 선친이 자식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일부러 꺼내신 것이다. 선친은 내가 경교장에 있을 때 김구 선생과 늘 겸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 뿌리에 의심이 갈 때마다 선친께 단도직입적으로 묻곤 했다. 그 때마다 내 선친은 단답형으로 대답하셨다. 김구 선생의 심부름으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 댁을 들렀다가 왔다. 간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선친께서 경찰서에 구류를 당했고 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력 10월 28일 큰 아버지 김영수 공 생신 때 꼭 잔치를 여셨는데 내 선친을 세 번 살려주신 음덕에 대한 보답이었다. 북한에 염탐을 가서도 죽을 고비가 있으셨는가 보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에서 일제 군경과 밀정을 처단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한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 문창학 선생(1882-1923.12.20.,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6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문창범 선생의 사촌동생이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2일 대한군정서 대원들과 함께 웅기항의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함경북도 경원군 소재 신건원주재소로 공격목표를 바꾸었다. 중국 화룡현을 떠난 대원들은 두만강을 건너 1월 5일 새벽에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주재소를 급습하여 일제 순사를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하여 일경 숙소를 파괴하였으며, 일제 군경과 교전 후 복귀하였다. 이후 만주 훈춘 등지에서 일제 군경 공격과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 1922년 12월 13명의 독립군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1923년 5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김학규(金學奎, 1900. 11. 24~1967. 9. 20 )선생은 1900년 11월 24일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4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파(白波)이다. 5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뜨게 되자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다 1910년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선생은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항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갑 선생 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12월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 통화현 이밀(二密)이라는 황무지 산골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도끼와 호미로 산지를 개간하고 옥수수와 콩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경야독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생의 온면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정형편이 점차 나아졌다 한다. 그 당시 통화현의 고산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시영, 이회영, 이상룡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들어와 독립군 기지건설에 노력하고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신팔균(申八均, 1882. 5. 19(음)~1924. 7. 2) 장군은 1882년 5월 19일(음)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 내부협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부 신헌(申櫶)은 삼도수군통제사, 병조판서 등을, 고조부 신홍주(申鴻周)는 순조(純祖)때 훈련대장을 지냈다. 특히 조부는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측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흑전청륭(黑田淸隆)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고 1882년에는 미국의 r. w 휴페펠트와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최초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명문가(名門家)에서 출생한 장군은 천성적으로 무관(武官)의 기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유학(儒學)과 고금병서(古今兵書)에 능통하였고 성품이 청렴(淸廉) 강직한데다가 문장 또한 비범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여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하였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석농(石農) 오영선(吳永善,1886~1939 )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1909년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위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북간도로 옮긴 오영선은 간민교육회가 1911년 3월 연길현 국자가에 세운 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4년 2월에는 간민회 의원에 선출되어 간도 한인의 권익 옹호에 적극 나섰다. ▲ 오영선 독립지사 오영선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나자구에 세운 대전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훈춘의 대황구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
▲ 《백년편지 1》 표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펴냄 [우리문화신문=김영조기자] 할머니, 오늘, 임시정부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이는 《백년편지 1》 첫 편지글의 한 토막으로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 선생 손녀 김선현 씨의 글 이다. 그런가하면 《백년편지 1》에 실린 60통 편지 가운데 마지막 글은 80여 년 전 이역만리 중국대륙에서 영화 황제로 등극하셨으면서도 돈과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항일영화, 민족영화에 투신하신 선생님 앞에 부끄럽습니다.라는 글로 이는 동양예술극장 유인택 대표의 편지 일부이다. 《백년편지 1》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년(2019)을 맞아 지난 2010년 4월 13일부터 2019년 4월 13일까지 일반인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쓴 편지글이다. 이 편지는 편지 대상에게 직접 발송하는 편지가 아니라 디지털 공간이라는 우편함을 통해 올린 글로 2010년 백년편지가 시작된 이래 지금(2016.3)까지 235통이 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먼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 후손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 독립 투쟁을 하시다가, 기어히 중국 하얼빈 역에서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시고 조국 대한민국에 신명을 바치신 의사님 영정앞에 깊은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저는 월간 저널 [영웅] 발행인 박창재입니다. 지난 3월 26일은 의사께서 순국하신지 꼭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 편지를 의사님께 올리면서,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처단하시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시면서 남기신 의사님의 최후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에 대하여 그 뜻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기어 보려합니다. 작년, 2015년 여름의 막바지는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천둥과 폭우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온 국민이 숨죽여야 했습니다. 이 천둥과 폭우는 다름 아닌 북측이 설치한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로 우리 측 군인 2명이 부상을 입으며 시작된 남북간 긴박했던 대치상황을 말합니다. 다행히 양측 고위급 접촉을 통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연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달렸다. 열차 안 중국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씹으며 무료함을 달랬지만 조선인 피를 받은 기자는 하얼빈이라는 세 글자가 찍힌 차표를 손에 쥐고 열 두 시간 내내 가슴이 아렸다. 이 길을 안 의사님도 열차로 달렸으리란 생각에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조국이 무엇이기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던진단 말인가! 2년 전 기자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끝 모를 대륙의 열차 안에서 그렇게 안 의사의 삶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안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역사 1번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지금도 하얼빈 역에는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거사 이후 안 의사는 곧바로 체포되어 뤼순감옥으로 떠나는 11월 1일까지 하얼빈에서 11일간 머물렀다. ▲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쪽 유리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이토히로부미 처단 현장, 열차 앞 부분 바닥에 표시가 되어 있다. 2014년 준공한 하얼빈역사에 있는 안중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존경하는 신명균 선생님, 저는 선생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일제의 멸망을 보기 전에 돌아가시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이 지킨 우리 말글은 광복 71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당당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민족 문화의 상징인 성과 이름을 말살한 일제에 맞서 순국한 선생님의 노선을 계승하여, 현재 우리 민족은 우리의 성과 이름을 당당히 쓰고 있고, 한자와 한자말이 아닌 순우리말과 한글로 지은 이름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 판결문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판결문에 선생님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신명균 선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추진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추적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과를 얻어내었습니다. ▲ 신명균 선생의 모습(1927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 신명균 선생님은 주시경의 직계제자로 우리말과 글을 수호하는 국어학자로서, 독도(뚝섬)공립보통학교와 동덕여고보에서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