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일제 침략 없었다면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갓 태어난 핏덩이
남겨두고 뛰어든
항일의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유치장 밖서
숨져간 어린 딸 눈에 밟혀
어찌 항일독립의 깃발 들었을까?
- 핏덩이 남겨두고 독립의 깃발 높이든 '박치은'- , 이윤옥 시
“네년의 남편이 곽치문이지?
“그렇다.”
“네 남편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왜경을 마구 쏘아 죽이는 악질분자다. 고얀 것들 !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강도들, 너희가 그런다고 독립이 될 줄 아냐? 이년은 악질이니까 옷을 벗기고 쳐야해.”
박치은 애국지사를 취조하던 왜경은 옷을 모두 벗기면서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며 실신하도록 팼다.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박치은 애국지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갓 태어나 이제 한 달 밖에 안 된 어린 생명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기에게 젖을 주어야하니 아기를 이리로 들여보내주시오.” 박치은 애국지사는 유치장 밖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기를 떠 올리며 그렇게 애원했다. 왜경은 이내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년이 새끼 귀한 줄은 아느냐?”며 아기의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유치장 창살 너머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왜경은 끝내 이들 모녀의 면회를 시켜 주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온 친척은 3일동안 유치장 밖에서 애걸복걸 해보았지만 왜경은 이들의 면회를 허락지 않아 끝내 아기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악랄한 인간들이었다.
박치은 (朴致恩, 1886.6.17~1954.12.4) 애국지사의 죄명은 불온단체인 대한독립부인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한 죄였다. 당시 박치은 애국지사의 이야기는 “산모를 나체로 심문, 어미가 정신없이 매 맞는 중에 아기는 경찰서 문 앞에서 죽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평남 대동(大同) 출신인 박치은 애국지사는 1919년 8월 추도일·강희성 등 1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부인청년단(大韓獨立婦人靑年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모집과 독립투사들에 대한 편의제공, 투옥지사와 가족들의 후원활동을 폈다. 또한 박치은 애국지사는 1919년 8월 무렵 김봉규・곽치문・나진강・김국홍 등과 함께 국민향촌회(國民鄕村會)를 조직하였으나 회원들이 잡히자 다시 같은 해 11월 대한독립대동청년단(大韓獨立大同靑年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 관전현(寬甸縣)에서 활동 중이던 대한독립광복군사령부(大韓獨立光復軍司令部)와 연계하여 권총을 입수한 뒤 대동군의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는데 이 단체에서 박치은 지사는 무기와 군자금의 보관을 담당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1921년 5월 왜경에 잡혀 1922년 4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당시 법정에는 열세 살 난 딸도 나와 어머니의 공판을 지켜보았는데 쇠고랑을 찬 어머니가 간수의 손에 이끌려 퇴정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이내 법정 안은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부모가 모두 옥살이를 하는 동안 열세 살에서 일곱 살에 이르는 어린 4형제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지내야 했다. 일가친척이 돌본다 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인지라 부모가 옥중에 있는 동안 어린 두 자매는 병사하여 숨지고 겨우 큰딸과 막내만이 살아남아 부모님의 출옥을 기다렸으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박치은 애국지사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여 그리던 두 딸과 재회했지만 남편은 징역 5년 형을 받아 아직 옥중 구속 상태였다. 그는 출소 뒤 어린 자매를 데리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으며 그러던 중 작은 식당을 꾸려 그런대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출소한 독립운동가 동지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 곽치문 애국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가출옥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원통한 노릇이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남편 곽치문 애국지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음)
박치은 애국지사를 비롯한 20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는 곧 나올 <서간도에 들꽃 피다> 6권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