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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최봉선 애국지사를 만나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기미년 마산 장터

     삼천 명 선두에 선

     의신학교 열다섯 소녀


     태극기 물결 속

     격문 뿌리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다 잡혔어도


     모진 고문 이겨내고

     조선인 투지를

     빛낸 당찬 모습

     광복의 밑거름 되었어라.  

                                                               -마산의 결사단을 이끈 “최봉선”, 이윤옥 시-


어제(21일) 최봉선(崔鳳善, 1904. 8.10~1996.3.8) 애국지사를 뵈러 대전국립현충원엘 찾았다. 칠월의 짙푸른 신록 속에 수많은 영령들이 잠든 무덤가에는 따가운 햇볕만 내리쬘 뿐 무덤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애국지사 제2묘역 564. 무덤에도 번지수가 있다. 애국지사 묘역은 정문에서 걷기에는 다소 먼 느낌으로 현충원 위쪽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봉선 애국지사 무덤으로 가는 길에 만난 숱한 분들의 묘비 시구(詩句)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람타는 섬 제주의 아들 / 제 살 썩혀 진주되는 법 알았으니 /조국의 외외한 혼으로 남으리 - 애국지사 부두전의 묘 -


찬이슬 눈보라에 님 한 몸 가눔 없이/ 빼앗긴 나라 찾기 오직 한마음/ 수만리 만주벌판 말달리며 지새운 나날/ 풍진 스무해 / 못 다한 큰뜻 가슴에 묻고/ 오호라 님은 가시니../ 그 한 사무쳐서 광복된 조국의 메아리는 /님의 혼 길이 기리리다. -애국지사 정기화의 묘-



한분 한분의 사연을 담은 무덤을 지나 최봉선 애국지사 무덤에 섰다. 7월의 눈부신 태양을 받아 빛나는 오석의 묘비에 최봉선 애국지사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국민이 독립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하지 아니하면 독립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3.1독립운동 정신은 바로 거족적으로 지속 투쟁하여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정신적 밑거름이다”




최봉선 애국지사는 경남 마산출신으로 1919년 3월 21일 마산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의 나의 열다섯살 때의 일이다. 의신학교(義信學校)에 재학 중이던 최봉선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계기로 김남준·이수학·안음전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이들은 궐기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 등을 만들었는데 최봉선은 자기 집을 비밀장소로 제공하였다. 발각되는 날이면 모두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날 의신학교, 창신학교 학생들과 장터에 모인 군중까지 3,000여명을 헤아리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봉선 애국지사는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대대적인 학생중심의 시위를 벌였다.


또한 1927년 3월에는 통영군 통영면에 거주하는 친일파이자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이 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지 않으며 조선어로 통역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매국적 발언을 한데 분개하여 시민대회에 동참했다. 그러나 “김기정은 일체의 공직을 파직하라”는 시민의 요구에 대해 김기정이 도리어 고소함으로써 박봉삼·황덕윤·황봉석등과 함께 12명이 통영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최봉선 애국지사는 석방되자 동지들과 함께 다시 3월 12일 시민대회를 열고 경찰서로 몰려가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김기정의 집으로 가서 고소 취하를 요구하였으나 김기정이 반성의 기미가 없음을 알고 15일 격문을 만들어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김기정의 집을 습격하며 활동하다가 또 잡혀 들어가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1년 8개월간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최봉선 애국지사는 1952년 마산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 교장을 거쳐 1968년에는 마산의신여자중학교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91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새믈원 이사를 맡았으며 1992년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한편 최봉선 애국지사의 형부인 박중한(朴仲漢, 1895. 7. 5~1970. 9. 17)애국지사도 1927년 2월 매국노 김기정의 행위를 규탄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1928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공로가 인정되어 정부는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박중한의 형 박종한 애국지사도 1995년에 대통령표창)



열다섯 의신학교의 당찬 소녀 최봉선!

기미년의 만세운동은 이들 소녀의 죽음을 불사한 결의에 찬 저항정신이 일궈낸 우리 민족의 승리요, 독립정신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의연했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후손된 우리의 부끄러움이 이 무더운 여름 더욱 후끈하게 등줄기를 달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