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희제 (1873-1939) 선생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수록(悳村隨錄)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 선생이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염재는 염재야록(念齋野錄)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킨다. ▲ 염재 조희제 선생 그러나 염재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 영 란(金 永 蘭, 1894~1922. 7. 12) 선생은1894년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新倉面) 신창리(新倉里)에서 4대독자로 출생하였고, 여기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11월 선생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 순천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순천군과 성천군은 평남은 물론 전국에서도 3.1운동 기간 중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희생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 군내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운동이 발발하여 7일까지 이어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또 순천군에서는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재판 모습 이어 3월 4일 자산면(慈山面)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월 5일 신창면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의 선도로 3천여 명의 장꾼들이 봉기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읍내에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2천여 명의 군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국가기록원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48점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새로이 지정하였다고 밝혔다. 이번에 지정된 기록물들은 1919년 3.1운동 때 만들거나 우리 민족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한 독립선언서들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를 비롯하여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보성사판과 신문관판의 독립선언서, 통영하동과 같은 지방에서 간행된 선언서와 격문, 하와이와 만주 길림 등 국외에서 간행된 독립선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2.8 독립선언서 는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 있던 조선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 선언서로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 2.8독립선언서,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 34.0 24.5, ▲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1919년, 최남선, 44.9 20.1 3.1독립선언서 (보성사판)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조판 인쇄하여 보성사판이라 명명하며,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에 따라 각지에서 당당하게 평화적으로 독립의사를 표명할 것을 촉구하여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
[신한국문화편지=이윤옥 기자] 저는 할아버지와 조은애 할머니의 아들 김진동의 차녀 수옥입니다. 할아버지가 나라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시다 납북되어 세상을 떠나신지 어언 65년이 지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 저는 겨우 만 일곱살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 딸을 둔 어머니입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을 위해, 일제의 패망 뒤에는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이 여기신 고 송남헌 비서실장님이 고 김재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함께 1989년에 우사 김규식 연구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우사 김규식 연구회는 할아버지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지금까지 모두 9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저는 김재경 회장, 서중석 교수, 심지연 교수, 김준상 총무, 손장선 서기등과 함께 이 연구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1월에 개회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출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라 안에서 궐기를 촉구하여 3.1 혁명의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강화회의에 가서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또 1922년에는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는 경술국치에 불평과 불만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소. 나는 우리 민족에게 각성을 주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살았으므로 사형도 좋소이다. ―선생의 법정 최후 진술 중에서(1923. 8) ― 남정각 (1897~1967) 선생은 1897년 12월 22일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오산(午山)이고, 이명(異名)으로는 남영득(南永得), 남영득(南寧得) 등이 있다. 선생은 1913년 16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상경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부설 학관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며 민족의식을 배양하여 갔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수원(水原)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이어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용인, 수원, 안성(安城) 등지에 배포하여 자주 독립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서의 격렬한 만세 시위운동을 촉발하였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에도 선생이 그렇게 바라던 조국 광복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1919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다. 선생은 중국 장춘(長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정태진(丁泰鎭, 1903. 7. 25~1952. 11. 2) 선생은 1903년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금릉리에서 부친 정규원과 모친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석인(石人),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개화하였던 선생은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4년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1921년 3월 졸업한 선생은 그 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이 시절 선생은 6살 위의 동기 동창생인 정인승을 만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공감대로 하여 서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선생과 정인승은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 업무도 같이하고, 또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옥중에서 고통도 같이 나누며 동고동락하게 된다. ▲ 정태진 선생 아울러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선생은 국학자이며 실천적 민족주의자인 정인보 선생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상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귀국한 후, 1922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정인보 선생은 우리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얼을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으로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 오삼열, 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 규암 김약연 선생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에는 여 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 신(鄭信) 등 38인과 함께 31독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백용성(白龍城, 1864. 5. 8~1940. 2. 24)선생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선생은 불제자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듯 어릴 때부터 자비스런 성품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9세에 이르러서는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의 영특한 문재(文才)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은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느낀 바 있어 남원 교룡산성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으로 찾아가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6세 때인 1879년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불법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해인사는 고려시대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 조판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정신여고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교장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지난 11월 중순이었다. 편지를 보내자마자 언제라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기자가 이희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간 날은 11월 30일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교정에는 늦 단풍나무 한그루가 붉은 옷을 입은 채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정신백년(貞信百年, 1887-1987)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어 정신여고가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임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여자고등학교(교장 이희천)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로는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김순애,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정숙, 장선희 애국지사 등으로 이들은 한국여성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답게 교장실에는 학사모를 쓴 김마리아 선생의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액자 밑에는 순국열사 김마리아(1892-1944), 정신여학교 4회 졸업. 모교의 교사로 재직. 2.8독립선언의 주동인물로 활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3.1 운동 당시 옥고를 치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추서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학생들과 2대 교장 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외증손녀인 오영숙 인사 올립니다. 오늘 저는 100년 편지 청탁을 받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대전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늦가을에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레더군요. 현충원에는 일제의 압제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애국지사 묘역부터 625전쟁 영웅들과 분단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천안함 폭침 희생자 묘역까지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근현대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묘역에 묻히신 분들은 모두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 정신으로 불같이 뜨겁게 살다 가신 호국 영령들이었습니다. 백합꽃 한 아름과 태극기를 할아버지 묘역에 꽂고 절을 올리고 나자 할아버지께서 저를 반겨주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하여 한참을 할아버지 비문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문에는 이조판서 예안 김백암 선생의 11대손으로 망국 조약 륵결에 비분강개하여 통정대부승정원비서승 벼슬도 버렸고 국치를 당하자 항일독립 전선에 신명 바쳐 싸우셨네. 노백린 장군이 보낸 모금 위임장에 따라 군자금 조달하다 옥고 2년 또 5년 치르며 모진 고문 다 견디고 순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