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선생님! 입춘도 지났고 꽃피는 춘삼월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쌀쌀한 늦겨울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며칠 전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방문 하였습니다. 관계자분께서 독립운동가분들께 드리는 100년편지를 부탁하시기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을 하고 선생님께 서신을 드립니다. 재작년 선생님의 순국70주년추모 사업으로 저명한 학자분들과 선생님의 후손 분들이 중심이 되셔서 추모논총을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부산에서 백산상회 건립 100주년 사업으로 학술대회를 개최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학술대회는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후에 백산상회 자리에 건립된 기념관을 방문하여 선생님 관련 자료를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국가보훈처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는 국외사적지 탐방 준비를 앞두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 MBC에서 선생님 관련 다큐영상을 촬영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의령 생가 및 백산상회, 그리고 중국 흑룡강성으로 촬영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래도 사람이 있는 풍경이 좋겠다는 생각에 사적지 탐방단에 촬영 팀도 동행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장진홍(張鎭弘,1895. 6. 6~1930. 6. 5(음)) 선생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문림리(文林里)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4년 3월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교하여 군사지식과 학문을 배운 후 상등병까지 승진하였으나 일제 치하에 있는 군대에서 더 이상 복무하기가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아 1916년 제대하고 말았다. 같은 해 12월에 서울로 이사하여 향리 출신인 이내성(李乃成)의 권유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경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1918년 만주 봉천(현 심양)으로 건너갔다. 만주에 도착한 의사는 조선광복단 소속의 이국필,김정묵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 방략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보다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정예화된 독립군을 양성, 후일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와 무력항전을 전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필국 등과 함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한인
[우리문화신문=이나미 기자] 고성의 독립운동 역사와 운동가를 정리한 《고성독립운동사》가 니왔다. 고성군(군수 최평호)은 고성 출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밝히고 널리 알리기 위해 그들의 행적을 살핀 《고성독립운동사》를 펴냈다고 밝혔다. 고성문화원(원장 도충홍)이 주관한 고성독립운동사 발간은 공동저자인 정해룡, 하기호 작가의 2년여 동안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과 각고의 집필 노력 끝에 결실을 맺었다. 《고성독립운동사》는 총 4장 271쪽 분량으로 1장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2장 고성지역의 31운동 전개, 3장 고성의 독립저항운, 4장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개인약전으로 구성됐다. 책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수록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 역사의 발자취를 담는 한편 고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함께 실어 고성이 충국의 고장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군 관계자는 국권침탈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굳건히 항일독립정신을 이어간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리고 후세에 유용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정이형(鄭伊衡,1897. 9. 16~1956. 12. 10) 선생은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아버지 정효기(鄭孝基)와 어머니 수원 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호는 쌍공(雙空)이며, 본명은 원흠(元欽)이나 이명인 이형(伊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선생(獨先生)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에게 한학을 가르쳐준 사람은 김평식(金平植)이었는데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후일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 등 복벽주의(復?主義)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 정이형 선생 따라서 선생은 그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복벽적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수용하였다. 그것은 한말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최근 방한 한 제니퍼 L. 테일러는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을 만나 할아버지 앨버트 테일러의 유품 일체와 딜쿠샤 관련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AP통신의 한국특파원으로 3.1 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서 발견해 서방언론에 알렸던 인물이다. 그의 손녀 제니퍼 L. 테일러는 할아버지의 유품과 딜쿠샤 관련 유물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하여, 2016년 3월 2일 오전 11시에 기증증서를 수여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장 강홍빈과 제니퍼 테일러 기증수여식 ▲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제니퍼 L. 테일러는 할아버지의 유품과 딜쿠샤 관련 자료 기증으로 3.1 독립운동을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와 그가 거주했던 가옥 딜쿠샤를 일반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기증한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의 자료들은 앨버트 테일러가 사용한 담배파이프, 3.1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편지, 호박 목걸이의 저자 메리 테일러의 호박 목걸이, 딜쿠샤 내부사진가 관련 문서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어제 3.1절, 구파발에서 녹번에 이르는 국도를 지나는 사람들은 국도변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로 아는 사람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와 '국기 불량'이 아니냐고 흥분해 하는 사람이 있엇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태극기는 은평구에서 3.1만세운동 당시 쓰던 진관사에 보관된 피묻은 태극기를 상징화 한 것이다.독립만세를 부르는 관중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일제 경찰들에 굴하지 않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동포들이 흘리던 피가 고스란히 태극기에 묻어 그날의 참상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 있는 태극기는 2009년 진관사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 해체 복원 조사 중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되었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이다. 이 태극기의 4괘는 현재의 국기와 비교하면 리ㆍ감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이는 19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하여튼 철저히 나라일 밖에 모르는 분이셨어요. 한번은 중경에서 큰아들이 결핵에 걸렸는데 마이신이 아주 비쌌을 때였지요. 중경은 1년에 안개가 4~5개월이나 껴서 햇볕이 아주 귀하여 결핵환자에게는 안 좋은 환경이지요. 거기다가 중일전쟁 상황이라 영양상태도 나빠서 더욱 치료가 어려웠을 때인데 큰아들에게 마이신 주사 한 대도 못 맞히고 결국 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그때 백범 선생은 임시정부 살림을 맡아 독립자금을 쥐고 계셨지만 그 돈을 아들의 마이신 주사 한 대도 쓸 수 없다고 하실 만큼 공과 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던 분입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2015, 서울시》에서 김구 주석에 대한 기억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대한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의 답이다. 김자동 회장은 어린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자란 산증인으로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1846~1922)이다. 동농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중추원 의장을 지낸 분으로 1919년 항일 비밀결사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마 저의 지루한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시 한 구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구절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이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시험 하나를 목표로 하던 저는 계절마다 당신의 평전을 읽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고 당신의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지닌 분인지 깨닫고 싶어 했습니다. 2015년 여름,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 까닭의 하나는 시인의 시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도쿄 도시샤 대학이 나옵니다. 그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의 교정 한쪽에는 당신을 기념하는 시비가 있습니다. 싱그러운 여름비가 연보랏빛 수국 위로 데굴데굴 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도시샤 대학 근처에 다다르자 자신이 이 대학의 교수라며 길을 안내해주신 영국인 교수님을 따라 도시샤의 교정을 거닐며 당신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수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시인의 기념비를 물어보니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길을 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김지섭 선생- 김지섭(金祉燮, 1884. 7. 21~1928. 2. 20) 선생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 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선생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10년 2월 14일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겨레의 원수 일본의 이등박문을 처단하여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다. 그런 2월 14일이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 쵸코렛을 주고 받는 날로 여겨지고 상술이 부추겨 대대적인 기념일처럼 술렁이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인의 적이요, 우리 겨레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안의사가꼽은 이등박문의 15개조 국혼 말살 죄악을보자. 1.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을사보호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 6.철도,광산,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