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마 저의 지루한 수험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시 한 구절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구절과 같은 아름다운 말을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신이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시험 하나를 목표로 하던 저는 계절마다 당신의 평전을 읽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고 당신의 시를 읽으며 어떤 생각을 지닌 분인지 깨닫고 싶어 했습니다. 2015년 여름,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 까닭의 하나는 시인의 시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을 가면 도쿄 도시샤 대학이 나옵니다. 그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의 교정 한쪽에는 당신을 기념하는 시비가 있습니다. 싱그러운 여름비가 연보랏빛 수국 위로 데굴데굴 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도시샤 대학 근처에 다다르자 자신이 이 대학의 교수라며 길을 안내해주신 영국인 교수님을 따라 도시샤의 교정을 거닐며 당신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수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시인의 기념비를 물어보니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길을 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촉도)보다 험하고 泰(태)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김지섭 선생- 김지섭(金祉燮, 1884. 7. 21~1928. 2. 20) 선생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 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선생은 일어를 배우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1910년 2월 14일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겨레의 원수 일본의 이등박문을 처단하여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다. 그런 2월 14일이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 쵸코렛을 주고 받는 날로 여겨지고 상술이 부추겨 대대적인 기념일처럼 술렁이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또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등박문은 대한(大韓)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인의 적이요, 우리 겨레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안의사가꼽은 이등박문의 15개조 국혼 말살 죄악을보자. 1.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한국의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을사보호5조약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독립을 요구하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 체제로 바꾼 죄 6.철도,광산,산림과 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일본이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산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 오는 나머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일까요? 문득 선생님이 사신 서른세 해가 깊고 높은 뜻을 펼치기에는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으로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삶을 사셨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1937년 중국 옌안 시절의 김산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3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여 전이었습니다. 미국의 기자 출신 작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Song of Ariran에서, 망국의 한을 안은 한 젊은이의 짧고도 치열한 삶을 처음 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받은 충격은 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고수해 왔던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바뀌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사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애가 실체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이외에도, 님 웨일즈의 표현대로 현대적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종익(宋鍾翊, 1887. 2. 27~1956. 1. 7)선생은 1887년 2월 27일 경북 대구에서 부친 송인구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05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큰 뜻을 펴고자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당시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하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선생은 이들 두 의사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송종익 선생 한편 191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의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맨 먼저 선생에게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이고 상의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단(團) 운동에 바치게 된다. 흥사단 미주본부를 이끌다 흥사단은 1913년 창단 이후 1920년까지 8년 간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하였고 1921년부터 이사부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다. 선생은 1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016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뽑힌한시대[1889~1981]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부모를 따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부친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물려받아 3대가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 가족이다. 선생은 1913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였다. 1916년 선생은 멘티카에서 부친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해져 대한인국민회 주관으로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한시대 선생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적극 동참하였다. 선생은 구미위원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구입하고 외교비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4년 경 다뉴바 한인국어학교의 교장이 되어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이후 딜레노로 옮겨 부친의 국어학교인 태극학교 설립 운영을 돕고 있던 중 1930년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36년 선생은 재미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실행위원이 되어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데 앞장섰으며, 19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와 맞서 언어독립투쟁을 전개한 이극로 선생의 부인되시는 김공순 여사님께 편지를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극로 선생을 연구하면서, 김공순 여사님에 대해서도 글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여사님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 이극로(18931978) 선생은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929년 1월에 귀국하여 우리 말글을 지키는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10월 우리말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고, 위원장에 뽑혔습니다. 그해 12월 24일에 김공순(1907?) 여사님과 결혼하였구요. 그의 나이 37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여사님의 나이는 23살이었지요. 김공순 여사님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넘겨준 김창걸의 막내딸이었는데 김창걸은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잡혀 희생되었습니다. 김공순 여사님은 평남 강서 진남포에서 출생했고, 평양여고와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시기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지요. 이극로 선생은 다른 회원과 달리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만을 전담하고자 직업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돈을 벌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한글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병조 선생(1877.12.23 ~ 1942.2.25)은 평북 용천(龍川) 출신으로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동년 10월 2일에는 평양에서 전국 각도 대표 24명이 모여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를 조직하게 되자 향촌회, 부군회(府郡會), 도(道)대회, 국민총회 등의 대표들이 박인관(朴寅寬)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양석진(梁錫鎭)채필근(蔡弼根)김태희(金泰熙)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송병조 선생 그러나 일경의 위협과 감시가 점차 가중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재무부 참사(參事)가 되었다. 1921년에는 한중 양국민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할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유종주(兪宗周)윤기섭(尹琦燮)김홍서(金弘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기독교 목사 손정도(孫貞道)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 등을 중심으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희제 (1873-1939) 선생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충절을 기록했다. 선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책의 표지에 덕촌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에 묻었다. 덕촌수록(悳村隨錄)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 선생이 1895년 을미사변 이후부터 1918년까지 의병장, 애국지사들의 절의실적(節義實蹟)을 모아 전기체로 서술한 6권 2책이다. 염재는 염재야록(念齋野錄) 원고를 완성하고 일제 경찰의 관심을 피하기 위하여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염재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킨다. ▲ 염재 조희제 선생 그러나 염재
[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 영 란(金 永 蘭, 1894~1922. 7. 12) 선생은1894년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新倉面) 신창리(新倉里)에서 4대독자로 출생하였고, 여기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11월 선생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 순천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순천군과 성천군은 평남은 물론 전국에서도 3.1운동 기간 중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희생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 군내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운동이 발발하여 7일까지 이어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또 순천군에서는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재판 모습 이어 3월 4일 자산면(慈山面)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월 5일 신창면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의 선도로 3천여 명의 장꾼들이 봉기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읍내에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2천여 명의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