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조시원(趙時元, 1904. 10. 23 ~ 1982. 7. 18)은 1904년 10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서 아버지 이화제(理化齊) 조정규(趙禎奎)와 어머니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7남매 중 6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조정규 선생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趙性龍)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신망이 높은 유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슬하에 장남 용하(鏞夏, 1977 독립장), 차남 소앙(1989 대한민국장), 3남 용주(鏞周, 1991 애국장), 4남 용한(鏞漢, 1990 애국장), 딸 용제(鏞濟, 1990 애족장), 5남 용진(鏞晋), 6남 시원(1963 독립장) 등 6남 1녀 중 6명을 비롯하여 손자 시제(時濟, 1990 애국장, 소앙의 2남), 인제(仁濟, 1963 독립장, 소앙의 3남), 손녀 순옥(順玉, 1990 애국장, 선생의 장녀,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의 부인), 자부 이순승(李順承, 1990 애족장, 선생의 부인) 등 4명을 합하여 일가족 10명을 독립운동가로 육성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집안이다. ▲ 독립운동가 조시원 선생 조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중국 곤명에 위치한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 대한통의부에 가입해 항일무력 세력을 재정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한 결과, 1924년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오동진이 일제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 제1지대장 이준식 지대장 1928년 만주지역 3부가 통합해 조직된 국민부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29년에는 국민부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창설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및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노선대립 등으로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1년 상해로 옮겨 중국군 고급장교로 복무하면서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장사, 광주 등지로 이전하게 되자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병사를 모집해 훈련시키는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은 1904년 숭실(崇實)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성학교 교사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소위 사내 총독(寺內總督)암살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동년 8월 독립신문의 기자로서 조동호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뒤 1921년 6월경 김승학이 동사 사장이 되어 신문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편집국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교포들에게 독립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이동녕(李東寧)이 피선되고 그는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김붕준김홍서와 함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의정활동에 참여하는 등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 1922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하여 뜻을 같이 하였으며, 시사책진회(
[한국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응칠 역사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혹시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씀드린다면,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있을 때에 쓴 자신의 자서전입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라면서 안응칠 역사는 또 뭐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응칠은 안 의사의 자(字)입니다. 안 의사의 배와 가슴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응칠 역사는 안응칠(중근) 개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직접 썼으니까 자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안 의사는 이 자서전을 1909. 12. 13. 쓰기 시작하여 사형집행 11일 전인 1910. 3. 15. 집필을 마쳤습니다. 안 의사는 자서전 집필을 끝낼 무렵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가 사형을 빨리 집행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서론만 쓰고 더 이상 쓸 수가 없었지요. 안응칠 역사 끝부분에 가면 안 의사가 평석(平石)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집행일을 예정보다 한 달 남짓 늦추어 달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평석 고등법원장은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송헌주 선생(1880~1965) 은 대한제국 시기 관립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3년 무렵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06년 쯤 미국 본토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로녹대학 재학 중이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국특사의 통역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미주에 알려진 직후 선생은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독립금 3만 5천 달러를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등에 사용하도록 지원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장직을 맡아 la에서 낙성식을 치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미주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송헌주 선생 1941년 선생은 재미 한인단체의 역량을 집중하고 항일운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직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국방과장을 맡아 맹호군으로 불리던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 한인국방경위대의 정위로 임명되었다. 1945년 광복 직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연합국 회의에 참가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선임되었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한 선
[한국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인천차이나타운 가까이에 있는 인천관동갤러리에서는 아주 뜻 깊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른세 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기 위한 붓글씨 전시회가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무명지 잘라 혈서 쓴 항일의 화신 남자현, 안사람 영혼을 일깨운 춘천의 여자 의병대장 윤희순, 총칼에 날개 꺾였어도 굽히지 않은 항일정신 박자혜, 포탄 퍼붓는 전선도 두렵지 않은 광복군 지복영 지사 등 모두 서른 세분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서전(詩書展)이 지난 7월 4일부터 오는 8월 2일까지 열리고 있다. ▲ 시서전 전시장 모습 ▲ 시서 작품 시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이윤옥 시인이 쓰고 붓글씨는 제35회 원곡서예문화상을 수상한 청농 문관효 선생이 썼다. 일제국주의 침략을 당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각자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많습니다. 김향화, 문재민 처럼 기생의 신분이거나, 고수복, 이효정 지사처럼 열악한 방적공장의 노동 현장에서 또한 부춘화, 김옥련 지사는 해녀출신으로, 그런가 하면 최용신, 차미리사와 같이 분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지요. 한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최석순(?~1925)1919은 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조직되었을 때 집서지단장(輯西支團長)으로 활동하였다. 최석순이 활동했던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창립총회에서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은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한국문화신문 = 양인선 기자] 열아홉 나이로 순국한 김용창 선열을 추모하며 이윤옥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아홉 형제 맏이로 줄줄이 동생들 챙기며 부모님께 효도했을 청년 김용창 식민지 땅에서 태어나 우편국 사환으로 뛰었지만 어찌 푸른 꿈까지 버렸을까? 조선은 독립의 때가 곧 온다고 힘을 모으자 동포에게 외치던 몸 왜놈에 잡혀 모진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던 날 산천초목도 울고 하늘도 울었어라 금쪽같은 아들 앞세운 아버지 피 토하며 뒤따르고 홀몸으로 아홉 형제 거둔 어머니 휘어 틀린 허리 사이로 무심한 세월만 흘러 모두가 떠난 상두리 고향 마을엔 오뉴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저 혼자 맴도네. ▲ 열아홉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걸은 김용창 지사의 앳된 모습 열아홉 청년 김용창(金容昶, 1926.8.3~1945.4.3)은 경기도 향남면 출신으로 푸른 꿈을 안고 열다섯의 나이로 상경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열다섯 소년의 할 일이란 사환 뿐이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을 거쳐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다. ▲ 향남면 상두리 선영에 있는 김용창 지사 흉상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이애라[18941921] 선생은 1894년 1월 서울에서 완사후인 시중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으로도 불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가인 이규갑(李奎甲) 선생을 만나 20세에 결혼을 했다. 이규갑 선생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서 한성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 종교와 육영사업에 헌신하고 독립운동가로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이애라 선생은 결혼 후에도 남편 이규갑 선생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계속했다. 그 후 1917년 이규갑 선생이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로 일하게 되면서 선생도 평양의 정의여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동지들의 연락이 있자, 이규갑 선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했고, 선생도 그 뒤를 따라 1남 2녀 중 젖먹이인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와 운동을 뒷바라지 했다. 또한 3 .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방이 되자 곧 바로 동지들과 합류하여 독립지사 후원 모금운동을 하는 등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애라 선생은 어린 딸아이를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류인식(柳寅植, 1865. 5. 3. - 1928. 4. 29) 선생은 경북 안동 예안 출신으로 퇴계 선생의 정통을 이은 정재학파로 철저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가문에서 자랐다. 그러나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오백 년 종사가 망하려는데 삼천리 강역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라며 비분강개하여, 청량산에서 의병항쟁을 펼쳤다. 1903년 신채호 선생과의 만남 이후 교육구국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1907년 김동삼, 이상룡 선생 등과 근대적 중등교육과정인 협동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 학교 졸업생 대부분은 만주로 망명하거나 3.1운동과 신간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개벽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라고 평할 정도로 선생의 협동학교 운영은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11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등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협동학교의 운영 경험을 인정받아 경학사 교무부장으로 재직하였다. 1912년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된 후 국내에 머물며 다방면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