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로 불렸던 발해는 늘 미지의 영역이었다. 학교 역사 시간에도 삼국 시대에 이어 잠깐 다루고 넘어가는 정도가 전부였다. 무언가 거대하고 융성했던 나라의 위용을 풍기면서도, 몇 줄로 급히 정리하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이현 글, 경혜원 그림의 이 책, 《해동성국 발해》는 아이에게는 발해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주고, 어른에게는 아스라한 발해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는 그림책이다. ‘나의 첫 역사책’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우리 역사를 흥미진진한 그림과 다정한 말투로 알기 쉽게 풀어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랴오허강 서쪽의 영주 땅까지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영주는 당나라에 나라를 빼앗긴 고구려, 말갈, 거란 유민이 골고루 모인 땅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은 언제나 같은가보다. 당나라 치하의 노예 생활은 참혹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당나라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사람 손만영이 먼저 나섰다. 당나라군을 무찌르고 영주를 차지한 그는 당나라 황제가 있는 장안성을 노렸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다스리는 당나라는 강했다. 그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건안12년(20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그의 초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지요. 그때 제갈량은 유비보다 21살이나 어렸으니 아들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관우와 20년, 장비와는 15년의 격차를 보입니다.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지요. 그런 제갈량의 집에 유비는 묵묵히 세 차례나 찾아갑니다.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유비가 삼국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것도 제갈량이라는 지혜로운 자에게 전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제갈량의 의견과 판단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유비의 삼고초려의 영향이 큽니다. 유비ㆍ관우ㆍ장비는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사이입니다. 두 아우 관우와 장비는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제갈량의 지시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겠지만 형이 삼고초려로 해서 어렵게 얻은 인재니 그 말을 따라주는 데 주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다면 관우ㆍ장비와의 불화로 인하여 제갈량은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고 믿어준 자의 편입니다. 지도력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경북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당포 초등학교 입구에서 '문경요'라는 표지판을 보고 성주봉 쪽으로 차를 몰고 한참을 가도 가마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내려와 다시 올라가 보니 길옆에 큰 장작더미가 보인다. 틀림없이 여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차를 세우는 순간 나무판자 같은 것으로 건물 전면을 감싼 창고 같은 건물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서 오세요" 문경요의 새로운 주인이 된 천경희 씨임에 틀림이 없다. 밖으로 창이 없어 투박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이곳이 도천(陶泉) 천한봉(千漢鳳) 선생의 도자미술관이다. 따님의 안내로 실내로 들어가니 선생의 숨결이 담긴 작품들이 멋지게 서고 앉아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하나같이 단아하고 깔끔하고 차분하고 정숙한 모습이다. 소문으로 들던 천한봉 선생의 성품 그대로다. 전시장 전면 높은 곳에 편액이 하나 걸려 있다. 행서 혹은 초서 같은데 꼿꼿하게 쓴 필치가 예사롭지 않다. 한자를 읽지 못하고 우선 누가 썼는가를 보니 76살 노인 효당(曉堂) 화상이라고 되어 있다. 효당이라면 스님으로서 불교와 다도(茶道)를 일으킨 최범술(崔凡述) 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따님 천경희 씨는 효당을 알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 나라가 망하고, 또 그 궁궐은 동물원이 되고… 불과 백여 년 전 우리 역사에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이런 슬픈 역사 속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김명희가 글을 쓰고, 백대승이 그림을 그린 이 책, 《동물원이 된 궁궐, 창경궁》은 창경궁이 품고 있는 슬픈 ‘창경원’의 역사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은 그림책이다. 일제는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모두 베고 곳곳에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리고 광복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창경원은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책의 앞부분에는 부모님과 창경원에 놀러 간 한 소녀의 이야기가, 책의 뒷부분에는 창경궁의 역사와 주요 건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재미와 정보를 함께 얻을 수 있다. 창경궁을 한 번쯤 가보거나 들어는 봤어도,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견주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창경궁은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은 ‘수강궁’을 성종이 증축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성종은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 세 대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고, 그래서 나랏일을 돌보는 ‘외전’보다 생활공간인 ‘내전'에 더욱 신경을 썼다. 세종이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서울 성곽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서울의 명소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성북동에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아한 한옥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 까닭은 한용운 선생님이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고 해서 숭인면의 산비탈 북향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고 하지요. 그는 평생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변절자인 육당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그는 호되게 혼을 내며 말하지요.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소" 한용운 선생님은 결국 북향집인 심우당에서 삶을 마감했는데요. 그때가 광복을 맞이하기 1년 전이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웅전 벽면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절이 있습니다. 주로 선종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견주어 그린 것인데요. 소를 찾아 나서다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발견하여 소를 데려다 기르다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소와 함께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곧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경상북도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청북도 충주시 미륵리로 넘어가는 해발 550여 미터의 재를 누가 하늘재라고 이름 붙였을까? 신라 초기 아달라왕 3년(서기 156년)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했고 당시에는 이 고개를 넘으면 백제나 고구려 땅이었을 터이니 아무래도 신라사람들이 붙였을 것이다. 하늘재를 문경 쪽에서 오르려면 지금 용흥초등학교가 있는 갈평리가 출발점이 된다. 필자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여기서 공부했다. 동행하는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3학년까지 다니셨단다. 추억이 서린 곳이다. 여기서부터 하늘재까지는 좀 아득하기는 하다. 사진에서 보듯 용흥초등학교 교정에서 보면 저 멀리 뾰족하게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것이 해발 1,165미터 주흘산의 주봉이고 그 험한 산들이 오른쪽으로 달려가다가 조금 낮아진 산등이에 계립령( 鷄立嶺)이란 이름으로 재가 서기 156년에 만들어졌으니 근 2천 년 전 일이다. 그때 이후 조선조 초까지 영남과 서울권을 잇는 대표적인 관문으로 활약했는데 550미터 높이라서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평지에서 넘으려면 하늘로 계속 오르는 것 같아서 하늘재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문경이 자랑하는 시인 권갑하 씨에게 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 문묘에서 세 왕께 예를 드리니 동궁과 성균관에 봄이 왔구나. 술 단지를 받든 모습이 엄숙하고 자리에 올라 글 읽는 소리가 새롭다. 나이 따라 양보하는 것은 주나라의 선비요 둘러앉아 듣는 이는 한나라의 빈객이라. 나는 직함을 가지고 태만히 한 일이 부끄럽지만 축하를 드리는 소리가 궁궐 안에 가득하네. 이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입학식에 관리로 참석했던 이만수(李晩秀)가 쓴 시다. 효명세자의 입학식은 1817년 3월 11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입학식에는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리들과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들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며” 구경했다. 이렇듯 왕세자의 입학례는 조선왕실의 기쁨이자 나라의 ‘경사’였다. 조선왕실의 공식 후계자가 학교에 갈 만큼 장성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예식이니, 그 위상과 중요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문식의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이런 왕세자의 입학식을 세세히 살펴보며 조선왕조가 후계자 교육에 얼마나 열성을 쏟았는지, 입학식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을 살면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종래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화로운 묘지 속에 묻히거나, 이름 없는 풀섶에서 인멸되거나, 한 줌 재로 바람에 날려가거나, 영생원 한 귀퉁이의 유골함에 담겨 보관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아무리 전생과 후생을 논하고 사후의 인생을 논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삶도 다 알 수 없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또한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건 강물처럼 인생을 본질적으로 멈출 수 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 역시 도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강물 같은 인생에서 우린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지요 우린 바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2023년 4월 15일 자정 독일의 네카베스트하임 원전이 가동을 멈췄다. 이로써 1969년부터 54년 동안 원전 36기에서 전기를 공급받던 독일은 탈원전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 독일의 탈원전은 정치인의 공적이라기보다는 50년 동안 꾸준히 원전을 반대한 시민운동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서독(당시는 독일 통일 이전)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에너지 주권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 1974년에 서독 경제부는 1985년까지 원전 50기를 새로 짓고 전력의 50%를 원전으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4년에 프라이부르크 인근 새로운 원전 부지 주변 주민들이 처음으로 원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원전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1976년 독일 북부 브로크도르프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3만 명이 원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79년 3월에 발생한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를 계기로 독일 시민들은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소련과 핵무기 감축 협상을 진행하면서 서독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결정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요즘 걷기 열풍이다. 그것도 맨발로 걷는 게 바람을 일으켜 높지 않은 산길이나 잘 가꿔진 공원길에서도 맨발로 걷는 분들이 많이 보인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걷는 길로 가장 좋은 곳이라는 문경새재 관문길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걷고 싶은 길 1위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늘 마음에 달고 있었다가 드디어는 걸어보기로 작심하고 도전해본다. 전날 밤을 새재 입구의 ‘국민여가캠핑장’에서 묵어 아침 햇살을 등에 지고 눈앞의 주흘산에서 안개가 걷히는 광경을 눈으로 맛보고는 우리는 걸음을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도(官道)로서 영남지방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로 가는 가장 큰 이다. 옛날 지역 수령으로 임명받은 신임관찰사가 구관찰사와 교대하는 곳,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의 흔적이 남아있고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세 개의 관문이 있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길인데, 무엇보다도 가장 걷기 좋은 길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 바로 옆 주흘산 동쪽 계곡이 고향인 필자로서는, 문경새재 이야기만 나오면 속으로 켕긴 것이, 실제로 문경 새재길을 다 걸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