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어찌 된 일인지 약속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나도록 아가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궁금하여 공중전화를 걸어보았다. 아가씨가 받는데,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못 일어나고 있었단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라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다시 삼십 분 이상이 지나서 미스 최가 나타났다.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피곤한 모습이다. 사실 술집아가씨들이 술을 즐겨서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직업이니까 할 수 없이 마시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짓궂은 손님들은 자꾸 술을 먹여서 젊은 여자가 해롱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일종의 가학성 술 먹이기라고 할까? 어제는 단골이 아닌 웬 뜨내기손님이 왔는데, 폭탄주를 5잔이나 돌려서 고생했단다. 김 교수는 평소에 마시는 커피 대신 미스 최에게는 생강차를 시키고 자신은 구기자차를 시켰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보니 생강차는 숙취 해소에 좋다고 쓰여 있고, 구기자차는 시력이 좋아진다고 쓰여 있다. 김 교수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항상 젊다고 큰소리치지만, 육체가 노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 인생 아닌가? 나이가 들어가자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나기 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여덟 번째 만남 김 교수는 그때까지 계속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는데 어떻게 거부한다는 말인가? 입시가 끝날 때까지는 참고 다닐 수밖에. 전에는 입시가 전기와 후기로 2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제도가 바뀌어 가나다라 군으로 4번의 기회가 있게 되었다. 수험생의 처지에서는 기회가 많아져서 좋아졌다고 볼 수 있겠다. 아들의 수능 점수로는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은 어렵다는데, 아들은 원서를 한번 넣어 보잔다. 김 교수는 조건을 붙였다. 가군과 나군은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넣되 다군은 김 교수가 근무하는 수도권의 S대로 원서를 넣자. 수도권의 S대에 합격하면 교직원 자녀로서 등록금이 면제되니까 조건이 좋았다. 이제는 합격자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 이번에는 김 교수가 미스 최에게 전화했다. 만난 지 1주일도 안 되었는데 웬일일까 미스 최는 의아해한다. “웬일이에요 오빠?” “갑자기 네가 만나고 싶어서 전화했다” “오빠, 나 《아리랑》 아직 다 못 읽었어요.” “《아리랑》이 그렇게 중요하냐? 오늘은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 꼭 만나자.” “알았어요, 오빠. 그런데 오빠 바람났나 봐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 주일쯤 지난 뒤 미스 최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 교수는 은근히 금요일이 기다려지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언제까지 미스 최를 만나야 하나? 이번에 만나면 무슨 결단을 내려야 할까 보다. 금요일은 마침 대학 입시의 면접일이었다. 김 교수가 속한 면접 팀은 음악 대학 지원자를 면접하게 되었다. 면접은 간단한 질문을 두세 가지 던지고 응시자의 답변 태도와 행동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점수 차가 크게 나지 않게 채점하지만 1, 2점의 점수는 가감할 수 있다. 질문은 아무 것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그날 음악대학 입시생이라는 점을 살펴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국악과 서양음악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응시자는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학생들의 답변은 대개 비슷하였다. 이들의 답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얻어진다. 서양음악은 7음계인데, 국악은 5음계이다. 서양음악은 화성을 중요시하여 벽돌 같은 몇 개의 음이 합쳐져야 아름다운데, 국악은 음 하나하나가 수석(壽石)처럼 중요하게 여겨진다. 서양음악은 쉼표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한해가 바뀌고 나서 며칠 후 김 교수는 미스 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더니, ‘기다리세요. 녹음을 남기려면 1번, 무얼 하려면 2번 어쩌고...’ 젊은 여자 목소리의 안내음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편리하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며칠 후, 미스 최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고 인사를 나누고, 그러더니 “오빠, 나 《아리랑》 제6권도 다 읽었어요. 한 번 만나 주셔야지요”라고 애교를 부리며 협박한다. 처음에 3권짜리 장편소설을 시작했더라면 벌써 끝났을 텐데, 12권짜리 《아리랑》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내가 만든 인과응보이니 어쩔 수가 없지. 토요일에 한번 만나자고 하니, 주말에는 용평스키장에 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 참... 술집 아가씨가 대학교수 기죽이네. 나는 스키의 ‘스’ 자도 모르는데. 그러면 잘 갔다 오고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하자고 말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김 교수와 격이 안 맞는 것 같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속담이 있는데... 겨울 방학이지만 김 교수는 날마다 학교에 나갔다. 방학이 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새해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아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해에는 항상 올해의 계획을 세웠다. 책을 1주일에 1권 이상 읽겠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 공부를 하겠다. 자격증을 하나 따겠다. 일본어를 배우겠다. 아들과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의 대화를 나누겠다. 교과서로 쓸 책을 한 권 쓰겠다 등등. 그러나 그러한 새해 결심은 항상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작심삼일에 그만 무너지는 결심도 있고 두세 달 가는 결심도 있다. 그러다가 연말에 돌이켜 보면 새해 결심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때는 방학 숙제가 많았다. 매일 일기를 쓰고, 곤충 채집을 하고, 명승고적 방문기를 기록하고 등등...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방학숙제를 해야 하는데...’라며 걱정만 했다. 그러다가 개학 날짜가 내일모레로 다가오면 그때야 방학숙제를 한다고 온 야단법석을 치르고도 언제나 한두 가지 숙제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다음 방학 때에는 꼭 방학숙제를 먼저 하고 놀아야지”라고 결심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반지 선물을 사기 위하여 두 사람은 프라이드를 타고 잠실 롯데 백화점으로 가서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층 여성용품 매장으로 갔다. 가장 접근하기 쉬운 1층 매장은 귀금속, 화장품, 구두, 가방 등 여성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파는 곳이다. 남자들이 돈을 열심히 벌면 결국 쓰는 것은 여자들이다. 백화점으로서는 여성고객 중심으로 매장의 위치를 정해야 할 것이다. 선물을 받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겠지만, 특히 여성들은 선물을 받으면 쉽게 마음을 여는 법이다. 여자가 선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책에서 배운 것은 아니고 살다 보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 뒤에 아내를 달래려면 다음 날 작은 선물을 들고 가면 쉽게 풀렸다. 하다 못하면 호떡 2,000원어치라도 사 들고 들어가면서 ‘여보, 이거 당신 주려고 사 왔어’라고 말하면, 대개는 마음이 풀린다. 여자들은 특히 보석을 좋아한다. 요즘에는 젊은 남자들도 귀걸이를 하지만 여자들이 귀걸이를 하고 보석 반지를 끼는 것은 꽤 역사가 깊은가 보다. 옛날 선사시대의 조개 무덤인 패총에서도 여자의 장신구가 발견되었으며 박물관에 가보면 옛날 사람들이 쓰던 금과 은으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아가씨의 말을 들어보니 화장하는 일이 그렇게 간단히 되지 않는단다. 출근 전에 반드시 화장하는 데 꼬박 1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매일 하지는 않지만, 머리까지 손보면 추가로 20분이 걸리는데, 오늘은 머리를 하다가 그만 늦었다고 한다. 아내가 화장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30분이 채 안 걸리던데, 아마도 아가씨의 화장은 특별한가 보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전문적이고 복잡한 화장을 하는가 보다. 그러나 그까짓 화장에서 1시간씩 소비한다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화장하는 것은 남자가 면도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화장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는 본능의 표현이다. 여자로 태어나면 화장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억제할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짐승이나 새의 경우에는 암컷보다는 수컷이 더 요란하고 외모로 보아도 아름답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 여자가 더 요란하게 치장하고 아름다운 것은 웬일일까? 혹시 다른 짐승의 눈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자연의 법칙에 예외라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그전에 언젠가 생물학과 박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여섯 번째 만남 일주일이 조금 지나 미스 최 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이 금요일인데 《아리랑》 제5권과 선물로 준 책을 다 읽었으니 만나자고 한다. 원래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만날까 예상했었는데, 너무 속도가 빠르다. 이러다가 일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젊은 아가씨가 만나자고 하는데 남자로서 고자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거절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5번 만났지만 아직까지 금전적인 면에서 그리고 성적인 면에서 부담이 없이 그저 친구 만나듯 했으니 더욱 뿌리치기 어렵다. 김 교수는 5시에 잠실의 호텔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김 교수는 프라이드를 운전하고 잠실로 갔는데, 그날은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차가 밀려 5시 10분에야 겨우 도착했다. 십 분 지각이다. 2층 커피숍에 올라가 둘러보니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가 갔나? 김 교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 나이에 바람맞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지. 아, 내가 아가씨에게 빠져드는가 보다. 김 교수는 ‘아가씨가 조금 늦겠지’라고 위안하면서 제일 안쪽 자리에서 입구를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지루한 법이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몇 시간 동안 부담 없이 즐겁게 지냈다. 술값은 공통 경비에서 부담하고 팁은 각자 알아서 주기로 했다. 기분이 좋으면 많이 주고 아가씨가 그저 그러면 기본만 주고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유성은 서울에 비하여 팁값이 좀 싸서 기본이 5만 원이라고 한다. 김 이사는 최 진희와 헤어지면서 “오늘 진희와 즐거웠어요”라고 말하면서 흰 봉투를 주었다. 그러면서 봉투를 나중에 열어보라고 말했다. 최 진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봉투를 받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가씨가 봉투를 열어보니, 봉투에는 현금 5만 원과 5천 원짜리 도서교환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유성에 다시 내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 교수는 아가씨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명함을 주지도 않았다. 아가씨도 김 이사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가벼운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 집 떠난 남자들은 모두 오랜만에 잘 잤다. 이튿날 아침에 햇님이 동쪽 창을 두드릴 때쯤 일어나 유성에 있는 군인휴양소(일반에게도 공개되고 있었다)에 가서 사우나를 했다. 사우나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같이 하니 교수들 사이의 친목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나라는 남자들이 집에서 술 마시는 습관이 발달하지 않고 술집(옛날 같으면 기생집)에서 술을 먹기 때문에 술 시중을 드는 직업여성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술집 여성과 남자 손님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관계가 가능하지만 가정 파탄까지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의 외도를 ‘바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남자의 바람은 일시적인 객기 정도로 취급하여 가정 파탄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람이란 잠시 불다가 시간이 지나면 멈추는 것이니까.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남자의 바람을 도덕적으로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독특한 술 문화가 오랫동안 전통으로서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나 유럽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권이다. 기독교의 10계명에서는 남자의 바람을 죄라고 간주한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남자의 바람을 용인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파티 문화가 발달해 우리나라의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같은 형태의 술집이 나타나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남자들이 퇴근한 뒤에 직장 동료와 함께 여자 있는 술집에 가서 한잔 한다는 그런 풍습이 없다. 특히 미국 남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