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명하여 단오의 영상시(迎祥詩,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짓는 시)를 그치도록 하였다. 그때 단오가 가까워졌으므로 승정원에서 세규(歲規)에 의하여 제술관(製述官)을 뽑아서 아뢰고 대제학 주문신(主文臣)을 불러 운자(韻字)을 내어 과거에 문제 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가뭄 피해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시문을 지어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위는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년) 5월 1일 기록으로 숙종은 가뭄이 심하므로 과거를 열어 시문을 지어 올리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임금은 이렇게 가뭄뿐만이 아니라 물난리가 나고 벼락이 치고, 돌림병이 도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부덕하여 이런 재난이 생긴다고 하여 과거에서 시문을 짓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감선(임금이 근신하는 뜻에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일) 하거나 초가에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 보면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남 백성의 일을 봉명사신(奉命使臣, 임금의 명을 받드는 신하)인 승선(承宣)에게 자세히 물은 뒤 연석(筵席, 신하가 임금의 자문에 응답하던 자리)을 물러 나와 촛불을 켜고는 관상감이 올린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이 천지신명에 답하는 정성을 간직하고 있었던들 놀라운 천재지변이 신하를 접견하는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혹시라도 듣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가운데 줄임) 이렇듯 듣고서도 듣지 못하다니 공경하는 마음을 제대로 지니지 못한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모든 조처와 행동에 있어 이르는 곳마다 법도에 맞지 않음을 더욱 알겠다.“ 이는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1798년) 10월 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둥소리가 나자 정조 임금은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이 그를 직접 듣지 못하고 상소를 보고 알았다는 것을 자책하며 임금이 친히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도록 명했습니다. 또 성종은 가뭄이 들어 오랫동안 감선했는데, 거기에 더해 낮에 물을 만 밥을 올리도록 하자 신하들이 ”보통 사람들도 지라와 위장이 찬 것을 싫어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