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갓난아이에게 입히던 옷으로 배냇저고리와 두렁치마가 있었습니다. 웃옷으로 입히던 배냇저고리는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 옷으로 배내옷, 깃저고리라고도 합니다. 희고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등에 솔기를 하지 않고 배와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지요. 그런가 하면 아랫도리로 입히던 두렁치마는 조선시대 어린아이의 배부터 아랫도리를 둘러주는 기능적인 치마로서 '두렁이', 또는 '배두렁이'라고도 하지요. 두렁치마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워있는 아기에게 뒤가 배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기저귀 갈기에도 편리하게 했습니다. 요즘처럼 옷감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아기 속옷도 없던 옛날에 몸이 여린 갓난아이에게 보온용으로 입혔던 것이지요. 흔히 무명이나 명주, 융 따위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어 만들었으며 누비로 만든 것이 많았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 보면 두 이레쯤(14일) 될 때 이 두렁치마를 입히기 시작한 듯합니다. 아기들이 기어다니기 전까지는 남아나 여아같이 입었지만, 자라면서 주로 여아들만 입었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두렁치마는 1900년대 여아용 누비 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조선의 출산문화’라는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9월호를 펴냈다.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시대였던 조선의 출산문화를 들여다보고, 행복한 가정을 위한 좋은 양육과 교육 시스템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출산문화는 어떠했을까? 박희진 교수는 <조선의 출산 조절기제와 문화>에서 조선시대의 출산 장려와 제한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살펴본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여성 1인이 평균 5.09명을 출산했고 이 가운데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남성은 1.25명 수준에 불과했다.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라 아들이 있어도 더 많은 아들을 원했다. 특히 18세기 종법 질서의 강화로 아들을 낳아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가 여성에게 지워지며 다양한 문화적 행위가 만들어졌다. 바위를 쓰다듬거나 껴안기도 하고, 돌을 넣거나 타고 놀기, 동전이나 돌 붙이기, 구멍에 나뭇가지 등을 끼우기 따위 행위는 유사 성행위를 흉내 내는 행태로 나타났다. 다산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도 조선 후기 출산율은 17세기 이후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성에 대한 터부, 여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