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도 잃은 노은주는 깊은 슬픔에 빠져 판소리와 단절하려 했으나 그에게 있어 판소리와의 결별은 불가능한 일임을 확인하게 되면서 성창순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노은주의 소리 공력이나 성실도를 인정한 성창순 명창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소리 공부한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전수자(傳授者)과정 이후에 이수자로도 당당하게 인정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수자(履修者)란 무형문화재 해당 종목의 수련 과정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전문가 길에 들어선 사람이란 뜻이며, 다음 단계가 ‘전승교육사’로 예능보유자(藝能保有者) 반열에 오르기 직전 단계라는 이야기, 문화재법은 이수자들에게도 전승교육사와 함께, 예능보유자 선정에 도전할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포기하려던 소리공부에 다시 불을 붙여 준 성창순은 어떤 명창인가? 노은주의 진심이 담긴 사모가(思慕歌)의 한 부분이다. “성창순 선생께 공부하면서 저는 3명의 아이를 출산했어요, 선생님은 우리 애들을 참 예뻐해 주셨지요. 선생님이 구기동의 4층 빌라에 살고 계셨는데, 어느 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한농선의 소리가 좋아 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노은주, 소리뿐 아니라 겸손함과,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매사 반듯한 스승의 태도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노은주는 선생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여의찮아, 그는 매주 서울과 남원을 올라 다니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농선 명창이 강조한 것처럼 아니리나 발림도 중요하나, 판소리는 항상 소리가 중심이어서 그 공력이 묻어나야 한다”라는 가르침, 특히“ 목 재주를 부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은주가 전하는 한농선 명창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 역시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선생님은 방이동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셨어요. 그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며‘집이 좁거나 작다’라는 등의 불평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매우 검소하셨고 참으로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때로는 선생님의 속옷을 제가 세탁하려고 하면, 야단을 치셨지요. ‘내 지저분한 옷을 왜 네가 하느냐?’라며 절대로 못 하게 하셨어요. 식사는 소식하셨고, 인근에 있는 돈가스 집이나, 현대백화점의 수타 자장면을 별미로 좋아하셨어요. 가끔 백화점에서 립스틱 사는 것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성창순 명창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신의(信義)있게 살거라”라는 말이었다는 이야기, 2016년 말,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응급적인 조치로 폐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연결하는 조치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 소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성창순 명창이야말로 진정으로 판소리를 사랑했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전해준 어연경은 현재 단국대 국악과와 이화여대에서 후진들을 지도해 오고 있는 한편,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데, 논문의 방향은 성창순 명창의 소리세계, 다시 말해 선생의 소리에 나타나 있는 특징적인 창법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들을 만한 대목, 곧 눈 대목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현재 전해오는 소리 가운데 판소리 <심청가>는 순조 때의 김제철이나, 철종 때의 박유전이 잘 불렀다고 하는데, 그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와 정재근 등을 거쳐 오늘에 이어오고 있다. 그 한 축은 이날치를 통해 김채만-박동실-한애순에게 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34살이 된 제자, 어연경이 단국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학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성창순 명창이 본인보다도 더 기뻐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얼마나 제자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깊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한다는 이야기, 성창순은 <국립국악고등학교> 개교 초기에도 판소리 강사로 출강하였는데, 학생들이나 교사들 대부분이 그를 환영하였으며, 글쓴이가 1983년, 단국대 국악과의 창설 학과장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그를 강사로 초빙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어연경은 생애 첫 판소리 완창발표회로 성창순 명창에게 배운 <심청가>를 2015년 12월,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가진 바 있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다듬고 암기하여 스승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나간 경험은 선생이 세상을 뜬 지금에 와서는 너무도 그립고 가슴 벅찼던 시간이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성창순 명창의 구음(口音)을 꾸준히 갈고 닦아 왔다고 하는데,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악기 반주자들과 함께 무용 반주음악도 담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승에게 배운 소리요, 구음이어서 구음에 관한 평가도 수준 이상이다. 훗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성창순 명창이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일시나 공연 일정, 그리고 공부의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고자 노력한 사범이었다는 점, 어연경은 선생의 병원 출입이 잦았던 관계로 선생의 주민번호를 아직도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다는 점, 병원을 다녀온 스승은 곧 제자들과 소리공부를 한다는 점, 이와 함께 제자들의 대학 진학이나 그들의 성장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말한 바 있지만, 어연경은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의 병원 출입이 잦아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승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게 되면, 환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 등을 확인하게 되는데, 어연경은 스승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암기하고 있었기에 각종 서류 작성이 쉬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본인의 번호는 기억한다고 해도 가족의 번호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마련인데, 어연경이 스승 성창순 명창의 주민번호를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2003년, 그의 스승, 성창순 명창이 뇌졸증 초기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성창순(1934-2017년)은 광주 성원목 명창의 딸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기를 보여 아버지는 딸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성창순은 각종 경연대회나 문화예술계 수상경력이 화려했고, 뒤에는 판소리<심청가>의 예능보유자에 올랐다는 이야기와 어린 어연경을 판소리 전수자로 받아들여 단가와 판소리를 지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성창순 명창은 안타깝게도 2003년, 그의 나이 69살에 뇌졸중 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제자들과 약속된 수업 시간이라든가, 수업 시수는 엄격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알려졌다. 어연경 역시, 40일 된 큰딸, 지원이를 데리고, 구기동에 있는 성창순 명창 댁으로 날마다 출근했다고 하는데, 도착해서는 <심청가>와 <춘향가>, <흥보가>를 반복해서 배우고 닦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도움과 사랑을 듬뿍 쏟아주셨던 선생님이어서 제자들 모두는 늘 마음을 다해 받들고 있는 고마운 선생님으로 남아계시지요.” 성창순 명창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어연경에게 물었다. 하나, 선생의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암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린 심청의 효심 어린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1930년대에 출간된 《조선창극사》에도 방만춘이 심청가를 고쳐 짰다고 적고 있는 점을 참고해 본다면, 조선조 정조(正祖)나 영조(英祖)무렵에는 <심청가>가 불렸다는 점을 알게 한다.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는 지금, 대학 국악과에서 판소리를 지도하고 있는 젊은 소리꾼, 어연경의 심청가 발표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8~9살 되던 어린 시절, 우연히 판소리 한 토막을 테이프로 듣게 되면서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저(高低)의 가락이 흥겹고 멋이 있어서 수없이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 모든 노래를 반복적으로 따라 부르게 되면, 비록 가사의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곡조의 표현은 충분히 가능한 법이다. 그 위에 가사의 전개 과정이나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더더욱 적극적인 표현이 될 것이다. 어린 어연경이 처음으로 익힌 노래는 바로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 대목이었는데, 춘향 역할을 맡아 멋진 창을 불러 준 소리꾼이 바로 성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