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교수] 1481년(성종 12년)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뒤쳐(번역) 보급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과 중국의 책에서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한 책이다. 1428년(세종 10년)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관리들은 강상죄로 죄인을 엄벌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강상죄는 죄인의 가족은 물론 죄인이 사는 지역에 이르는 사람들까지 죄를 확대해 처벌하는 엄한 벌이었다. 이에 세종은 1432년(세종 13년) 《삼강행실도》를 펴내 백성들에게 유교의 도를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때는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문으로 설명을 단 탓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성종 때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뒤쳐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Translating the First Picture Book Samgang Haengsildo into Hangeul In 1481 (the 12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Samgang Haengsildo was translate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신(文臣)을 선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흥시키시는 동시에, 문과는 어렵고 무과는 쉬운 때문으로, 자제(子弟)들이 많이 무과로 가니, 지금부터는 《사서(四書, 유교의 경전인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을 아울러 말함)》를 통달한 뒤에라야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는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년) 2월 16일 기록으로 좌의정 박은이 세종께 아뢴 말인데 세종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세종 때는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고, 큰 학문적 성과도 이룩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과는 집현전(集賢殿)이 그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집현전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문 연구기관인데 조선의 으뜸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책을 펴내는 등 활동을 했습니다. ‘집현전’이라는 이름은 고려 인종 때 처음 나왔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기구였지요. 그러나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 연구의 중심기구로 삼는 한편, 학문과 품성이 뛰어난 으뜸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집현전은 세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7) 생각이 이리저리 일어날 때는 유물 앞에 가만히 있어 보세요. 앙증맞은 형태나 재치있는 표현이 와닿아서든 어떤 기억을 불러와서든, 내 마음을 끄는 유물을 바라보다 보면 잡다하게 일어나는 생각이 잦아듭니다. 모닥불이나 숲,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고요해집니다. 불멍, 물멍, 유물멍 … 온갖 도파민과 자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무념무상하게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작은 호사다. 생각을 비우고 ‘그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어쩌면 현대인이 갈망하면서도 쉽게 누리지 못하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 이 책, 《유물멍: 가만히 바라볼수록 좋은 것들》은 박물관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 구독자에게 보내는 유물 이야기인 「아침 행복이 똑똑」에서 좋은 글을 가려낸 것이다. 학예사부터 작가, 새 학기를 앞둔 아이까지 유물을 보는 다채로운 시선과 참신한 생각들을 담았다. 어려운 연대와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지 않고도, 그저 멍하게 유물을 바라보다 생각난 것을 자유롭게 써 내려간 느낌이어서 더욱 진솔하다. 「아침 행복이 똑똑」의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유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족히 1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중세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호칭으로 ‘왕’이나 '임금( 님+ 그+ 음 즉 높으신 분)을 많이 쓰지만 그밖에 통치기간 가운데 업적이 많은 분은 특히 ‘대왕’으로 불린다. 그 기준은 한두 사람이 평가하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당대의 평이 있거나 오랫동안 사학자들의 평가를 한 결과일 것이다. ‘대왕’은 임금 전체를 높여 부를 때도 쓰지만, 그보다 특히 업적이 뛰어났을 때 ‘00대왕’이라는 시호(諡號)나 존호(尊號)로 강조하여 부른다. 시호(諡號)는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유학에 정통한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이고 존호(尊號)는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올리던 칭호다. 한국사에서 공식적으로 또는 전통적으로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로 불린 인물들은 많지 않다. 그중 한국사에서 대표적으로 “대왕”으로 불린 군주·위인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단군대왕(BC2333 ~)이다. 후대 사서와 민간 신앙에서 ‘단군대왕’으로 부르고 있다. 옛 기록보다 조선ㆍ근대 민족주의 시기에 강화된 표현이다. 다음은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0~41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조선왕조실록>에 풍운뢰우(風雲雷雨)는 87번이나 등장한다. 이후 문장은 기우제나 산천제와 연결되는 문장이다. * (풍운뢰우제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다) 임금이 풍운뢰우제(風雲雷雨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세종실록⟫6/2/3) ‘기우제(祈雨祭)’란 낱말은 모두 822건 등장하는데 세종 때 92건, 숙종ㆍ영조 때도 90여 건이 된다. 세종 때 가뭄이 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단지 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에 대비한 간척, 저수지, 수로 문제 등 여러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세종 때 농사에 관해 관심이 컸다는 방증도 되겠다. 세종 때를 중심으로 비에 관한 기사들을 보자. * (풍우 재앙이 심한 영춘ㆍ단양에 조세를 면제하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종선(李種善)이 계하기를, "영춘(永春)ㆍ단양(丹陽)에 풍우(風雨)의 재앙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어, 손실(損失)이 8, 9분에 이르렀으니, 원하옵건대, 금년 조세(租稅)는 한 섬[石] 이하의 것은 면제하여 주기를 비옵나이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4/10/5) * (장마가 계속될 것 같아 밀·보리가 성숙하는 대로 재촉하여 베게 하다) 경기 감사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그 역사를 보자. 《세종실록》 25년(1443) 12월 30일 기사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다’라고 되어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25/12/30) 이후 잠잠하다가 다시 세종 28년에 기사가 나온다. 3년 동안 훈민정음에 대한 음운연구와 구체적인 시행방안 등의 연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어 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진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정치를 펴는 데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로 인재들을 모으고 합당한 임무를 주고 뒤에서 보조해 주는 데 있었다. 임금이 인재등용의 중요성에 대해 이조에 전지한다. 이조에 전지하기를,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관원이 그 직무에 적당한 자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지나니, 그 직위에 있는 동반 6품과 서반 4품 이상으로 하여금 현직이나 해직 중을 가리지 말고 슬기로움과 씩씩함이 뛰어나서 가히 변방을 지킬 만한 사람과 공정하고 총명하여 가히 수령직에 대비할 수 있는 자와,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극히 번거로운 자리에 감당할 수 있는 자 3명을 각각 천거하여 임용에 충당하게 하되, 혹 그 인재를 알기 어렵거든 과목마다 반드시 각기 한 사람씩을 찾아서 구할 것 없이 다만 아는 대로 〈쓸 만한 사람〉 3인을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하여, 〈그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치게 한 자는 율문을 살펴서 죄를 과하되, 조금이라도 가차 없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5/11/25) 인재 추천을 통해 임용에 임하되 정사를 어지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상대를 믿는다는 한마디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세종 14년(1432)에 황희가 나이가 많아 사직을 요청했을 때 세종이 하신 말씀이다.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영의정 황희가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하건대, 잘못 태종께서 선택하여 후히 대우해 주신 은혜를 입어 여러 어진 이들과 섞이어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으나, 수년 동안 죄를 마음으로 달게 받으면서 궁촌(窮村)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더니, 하루아침에 착한 임금의 세상에 다시 거두어 쓰실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우물쭈물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애써서 관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귀는 멀고 눈도 또한 어두워서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려우며,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집니다. 더군다나 신은 올해의 생일로 이미 만 70살이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나이가 노쇠에 이른 것을 가엾게 여기시며, 신의 정성이 깊은 충정에서 나온 것을 살피시고,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직위에서 물러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어려운 것을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이 정치를 하며 신하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 하고 일을 처리함에 신중히 하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보아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론 끝에 결론에 이루지 못하는 경우다. 이때 몇 가지 대안이 나올 것이다. 다시 생각하여 훗날 재론하든가 아니면 그 안건을 일정기간 연기하든가 아니면 파기하든가 일 것이다. 먼저 ‘여경상량’을 실록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횟수는 아니나 세종 때 8번 나와 빈도수로는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다. <세종실록>에 보이는 내용의 개요를 보자. 1. 세종 7년 5월 14일: “장리 최맹온의 부정을 징계하자는 집의 김타 등의 상소문이다.” 2. 세종 7년 6월 2일: “좌의정 이원 등과 관리의 승급·수령 파면의 일을 의논하다.” 3. 세종 10년 5월 26일: “김효정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상소를 올리다.” 4. 세종 11년1월 4일: “중국 황제가 구하는 석등잔의 헌납 방법과 학문진흥책을 의논하다.” 5. 세종 12년 8월 13일: “현재 강경법의 《육전》에 기재를 허락지 않는다.” 6. 세종 14년 3월 15일: “상장소 제조 맹사성ㆍ권진ㆍ허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은 정치 현장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려고 했다. 그 첫째는 토론(討論)을 즐겨한 일이다. 토론은 이어 조금 더 주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의견을 나누게 되는데 이 과정이 논의(論義)다. 논의를 거치면 다음에는 그 일의 결정이 지어져야 하는데 이 시점이 바로 의결(議決)이다. 그래서 논의의 주제가 정해지면 토론-논의-의결의 순서를 밟아 주어진 과제를 마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에 제목을 단 ‘토론의결’은 사자성어라기보다 ‘사자조어-四字造語’가 되겠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한문으로 기사를 찾으면 토론(討論) 8건, 논의(論議) 19, 의결(議決) 3건이 있다. 실록 원문 기사들을 통해 토론-논의-의결의 과정 곧 어떠한 문제들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 얼개를 보자. (경연관을 합하여 한 번으로 하고 강한 후에는 경연청에서 토론하게 하다) "번(番)을 나누어 나아와서 강(講)하는데, 모두 다른 사무를 맡은 관계로 많은 글의 깊은 뜻을 강론(講論)할 여가가 없어서, 나아와서 강(講)할 즈음에 상세히 다하지 못하게 되오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합하여 한 번(番)으로 하여, 나아와서 강(講)한 뒤에는 경연청(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