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谷城 泰安寺 寂忍禪師塔)」을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하였다. * 태안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구례 화엄사의 말사(末寺, 본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로, 신라 경덕왕(742~765)때 신승(神僧)이 대안사(大安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조선시대 이후 태안사(泰安寺)로 사용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동리산문(桐裏山門)*을 세운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의 승탑이다. * 동리산문: 신라 헌덕왕(809~826) 이후 당나라에서 선법(禪法)을 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형성한 선종(禪宗)의 9개 파(派)인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태안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파(門派) * 혜철: 814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법을 전해 받고, 동리산 태안사에 머물면서 동리산문을 형성하였고, 입적 후 신라 경문왕으로부터 시호(諡號)는 적인(寂忍), 탑호(塔號)는 조륜청정(照輪淸淨)을 받음.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여러 개의 석재를 짜맞추어 조립한 가구식 기단을 별도로 조성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의 전형이다. 탑 맨 아래에 있는 하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가에는 충(忠)을, 부모에서는 효(孝)를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았던 성리학의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고, 그가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임금으로서 해야할 바를 다 할 때, 곧 임금 자신의 권세만 누리고 잇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고,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실천의 의무를 다할 때. 신하와 백성들은 그 임금에게 충성을 해야하는 것이다. 임금의 행실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없이 나라의 안위를 보살피지도 않고 방탕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잘못된 일을 하여도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리학에서는 임금이 그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역성 혁명도 가능하다고 맹자의 가르침에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임금이면 곧 나라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워 임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도 그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하거나 잘못된 명령에 따르지 않고 관직을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그 댓가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재산을 하사받고 생전에는 물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00년에 가까운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국 어디나 절터가 없었던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과 가까워 큰 절이 없는 지역인 연천이지만 이곳에도 많은 절들이 있었고 그 규모도 꽤 큰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연천 오봉사와 스님의 승탑을 찾아본다. 오봉사는 연천 한탄강변 재인폭포 근처에 있는 고찰이었다. 오봉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타서 옛 자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오직 스님의 승탑 1기만이 외롭게 남았다. 그런데 신라말 이후 한국의 불교는 선종(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믿는 종파)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타계한 뒤 화장하여 유골 중 수습된 사리를 모아서 승탑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스님들의 승탑은 바로 그 스님의 업적과 덕행에 따라 당대의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승탑만 보아도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스님을 존경하였는지 신도들은 스님의 깨달음의 정도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하곤 하였다. 따라서 큰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