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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연천 오봉사터 승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000년에 가까운 한국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국 어디나 절터가 없었던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절들이 있었다.  지금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지역과 가까워 큰 절이 없는 지역인 연천이지만 이곳에도 많은 절들이 있었고 그 규모도 꽤 큰절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연천 오봉사와 스님의 승탑을 찾아본다. 오봉사는 연천 한탄강변 재인폭포 근처에 있는 고찰이었다.

 

오봉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천년 고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타서 옛 자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오직 스님의 승탑 1기만이 외롭게 남았다. 그런데 신라말 이후 한국의 불교는 선종(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믿는 종파)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은 타계한 뒤 화장하여 유골 중 수습된 사리를 모아서 승탑을 만들었다. 이런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스님들의 승탑은 바로 그 스님의 업적과 덕행에 따라 당대의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승탑만 보아도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스님을 존경하였는지 신도들은 스님의 깨달음의 정도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하곤 하였다.

 

따라서 큰절의 입구에는 그 절에 있었던 고승들의 사리탑을 모아서 절의 역사를 말없이 느끼게 하였고, 특별히 당대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던 스님들의 사리탑은 절의 깊숙한 안쪽에 설치하여, 절에 있는 스님들이 늘 찾아서 보살피며 제자의 예의를 갖추었다.

 

연천 오봉사 또한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재가 있었을 것이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기울어 가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건축물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오직 한 스님의 사리탑뿐이다. 스님의 사리탑은 스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면 언제 누구의 사리탑인지 알 수 있게 되는데, 오봉사터에 남아 있는 스님 사리탑은 아쉽게도 스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으며, 그 형태와 규모로 보아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오봉사터 승탑은 그 형식이 석종형부도(돌을 종모양으로 새긴 승탑)로 이런 형식은 조선시대 이후의 형식이며, 그 규모는 높이가 2..07m 둘는 3.17m에 이르는 석종형으로 당시 스님들의 승탑 중에서는 매우 큰 규모로 조선시대 당대 스님들로부터는 매우 존경받았던 스님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본래 이곳에 있었던 승탑을 장식품으로 여겼던 근세 문화재 도굴꾼들이 산속 깊이 홀로 서있던 승탑을 훔쳐갔다가 도굴꾼을  붙잡은 뒤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와 세우는 과정에서 승탑의 앞과 뒤가 바뀌어 세워져 오늘이 이른다. 오봉사터 승탑은 전체적으로 석종의 모양이나, 앞면에는 보다 정성스럽게 다듬고, 연꽃문양를 새겨넣었으며, 뒷면은 그런 장식이 없이 밋밋하다. 승탑의 상륜부는 조선시대 석종형 승탑 중에서도 매우 큰 모습으로 마치 큰 모자를 쓴 듯 특이하다. 승탑의 주인인 스님에 대한 기록은 본래 승탑의 옆에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증명되는데, 아쉽게도 오봉사터 승탑은 옆에 세워져 있었던 그 비석이 없어져서 스님의 행적을 알 수가 없다.

 

지금은 스님에 대한 기록은 없어지고, 최근 승탑의 도난과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기자정보

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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