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79돌 광복절을 맞아 민간이 소장했던 자료 속에서 찾은 일제 강점기 뼈아픈 역사를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지 2~30년이 지난 1930~40년대 학교와 마을에서 당연한 듯 이루어진 신사 참배나 군사 훈련,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동원되며 찍은 사진들은 그래서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신사 참배와 군사 훈련 현장 1930년대 중반, 공립 이리농림학교의 학생들이 날마다 일정한 시간 교내에 있는 일본 신사를 참배하고, 경성(서울)에 수학여행 간 학생들이 남산에 있는 신사를 참배한 뒤 찍은 사진이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이루어진 신사 참배나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인 남산 신사 참배는 은연중 일본이 원하는 신민이 되어가는 수순이었다. [사진1, 2] 1930년대 중반 공립 이리농림학교 교내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모의 전쟁으로 진지를 탈환하는 장면을 연출한 사진, 일본 욱일기가 걸려 있고 멀리 산 위로 신사가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 훈련하고 찍은 사진, 1940년대 초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이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일본 훈련대장의 훈시를 듣는 모습, 1941년 강경상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할머니 세대가 ‘가장 예뻤을 소녀시절’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생생한 기록입니다. 열두 분의 할머니와 한 분의 할아버지 증언을 바탕으로 그 당시 청소년들이 경험했던 삶의 단면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 아카이브는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 우리 민족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엮은이 말-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생생한 구술 자료인《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서출판 얼레빗)가 지난 6월 25일 출간되었다. “나는 1927년생 퇴끼띠고 98살이야. 퇴끼띠가 새벽에 났기 때문에 어디 가면 먹을 게 많이 생기는 거야.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농사지으셨어. 7살 먹어 어머니 재혼 가고, 12살 먹어 아버지 돌아가서 부모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제시대에 지집아(기집애) 공출 보낼 적에 일본에 안 붙잡혀 가게 할라고 우리 고모, 고모부가 시집을 새벽에 보냈어. 너무 일찍 보냈다고. 공출 안 갈라고 내가 15살 10월에 시집을 왔다고. 형제는 나 하나, 외동딸이야.” -정선 출신 김옥련 할머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915년 5월 4일 자 매일신보에는 국산 맥주광고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삿ᄲᅩ로 맥주와 아사히 맥주로 일제였지만, 일본과 조선을 하나로 하여 국산(國産)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933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에는 조선과 일본을 똑같이 짙은 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은 일본의 영토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광고는 “동양의 맹주 일본! 동양의 명주 사쿠라”라고 광고문구를 썼고 이는 결국 사쿠라 맥주를 마시면서 조선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흉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광고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조선으로 들여오면서 삽화나 광고문구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조선에서 광고함으로써 광고 본래의 기능보다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한 것입니다. 드디어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위하여 1937년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뜻으로 내건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치달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23년 9월 25일 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씁시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작용과 기술로 된 광목”이라는 경성방직주식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