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국립무형유산원, 국가유산진흥원(이사장 최영창)과 함께, 오는 12월 12일부터 15일까지 코엑스 C홀(서울 강남구)에서 열리는 국내 가장 큰 규모의 공예 전문박람회인 ‘2024 공예트렌드페어’에 다양한 작가들의 전시와 작품들로 참여한다. 먼저,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진흥원과 함께 국가무형유산 전승공예품 브랜드인 ‘케이 크래프트(K-CRAFT)’를 주제로 한 전시관을 운영한다.(12.13.~15.) 이 자리에서 국가유산청은 무형유산의 전승과 판로 개척을 위해 현대 디자이너와 협업해 대중적인 전승공예품을 개발토록 한 디자인 협업 지원 사업과 품질을 인증해 공신력을 높여주는 전승공예품 인증제 사업, 무형유산 이수자들의 전시 지원 사업으로 제작된 전승자들의 전통공예 작품 90여 점을 출품했다. 전시에는 둥근 형태의 두루주머니를 금박과 백금박으로 화려하게 만든 ‘가죽 금박 두루주머니’(박수영 국가무형유산 금박장 이수자, 김주일 디자인주 대표), 반으로 접어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누비 가방’(하은정 국가무형유산 누비장 이수자, 김현지 원이어퍼포먼스 대표), 은 상감으로 장식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복온공주가 홍장삼과 대대(福溫公主家 紅長衫과 大帶)」를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복온공주가 홍장삼과 대대」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의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의 혼례복에서 유래한 유물로, 홍장삼은 앞과 뒤를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수로 꾸민 예복이고, 대대는 홍장삼을 착용할 때 가슴 부분에 두르는 폭이 좁고 긴 장식띠다. 조선 왕실에서 홍장삼은 후궁과 공주ㆍ옹주(翁主), 왕자 부인이 혼례복으로 입었다. 복온공주는 1818년(순조18)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의 둘째 딸로 태어나 1830년(순조30) 4월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1819~1853)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복온공주 가례의 준비 내용과 진행 절차 등을 기록한 《복온공주가례등록(福溫公主嘉禮謄錄)》에서 공주의 혼례용 예복으로 홍장삼을 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온공주는 불과 2년 뒤인 1832년 세상을 떠났으나, 홍장삼은 김병주의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며 섭성(攝盛) 풍속에 따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혼례복으로 쓰였다. * 가례(嘉禮): 경사스러운 예식 또는 왕실 가족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서울의 동북쪽인 경기도 양주에 한 때는 삼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컸던 회암사(檜巖寺) 터가 있는데, 중심 전각인 보광전(普光殿) 터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 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여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수막새 가운데 범어인 ‘옴’자가 있고 글자 좌우에 효령대군’이, 하단에 ‘선덕갑인오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를 설명하면, ‘효령대군(1396∼1486)’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둘째 형으로 불교를 옹호한 대표적인 왕실 인물이고, ‘선덕’은 중국 명나라 선종(宣宗, 재위 1426~1435)의 연호로, 선덕연간 중 갑인년은 1434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수막새는 1434년 5월에 제작되어 보광전 기와로 사용되었으며, 효령대군은 수막새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보광전 불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왕자 이름이 왜 사찰 수막새에 등장했을까? 조선시대의 특징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공식처럼 외워왔는데,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인 대군이 무슨 연유에서 절 수막새 제작에 관여했을까하는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왕실은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조선 왕실에 태어난 아이는 특별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핏줄로 태어난 것부터가 특별한 일이거니와, 특히 왕위를 이어갈 ‘원자’로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왕실에서는 자녀교육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 정성이 반드시 아이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조기교육’은 그저 뛰어놀고 싶을 나이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물론 특별한 자질이 있는 경우에는 공부로 가득 찬 일과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버거운 일상이었다. 신명호가 쓴 책, 《조선 왕실의 자녀교육법》은 조선 왕실의 태교부터 육아, 청소년 시기의 갈등 해결 방법까지 자녀교육의 모든 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사람을 낳고 기르는 일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았나 싶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던 조선 왕실을 보면 나라를 이끌어가는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p.243)좌의정 채제공: 회의를 시작한 지 이미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도 원자는 마치 심어 놓은 나무처럼 단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