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우리는 우치야마(内山) 공민관이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도착했다. 시골 한적한 곳에 자리한 자그마한 1층 건물은 예전 우치야마 소학교(초등학교, 이후 우나즈키(宇奈月) 소학교가 됨)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새로 지은 공민관 안에는 우리나라의 노인정처럼 지역 노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동행한 ㅎ 선생님은 바로 앞에 있는 우치야마역 철길을 건넌 뒤, 물이 나오는 호스를 찾아내어 준비해 온 빈 페트병에 물을 담으셨다. 궁금했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산자락을 오르다 오른쪽 숲으로 조금 들어가니, 이끼 낀 작은 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여야용묘(呂野用墓)’였다. 뒷면에는 ‘朝鮮慶北大丘府明治町’이라 새겨져 있다는데, 글씨는 닳아서 이끼와 때가 뒤엉켜 분간하기 어려웠다. 여야용묘는 호리에 세츠코(堀江節子) 씨가 조사하여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원제:黒部・底方の声黒三ダムと朝鮮人)》(1992)에 발표했고, 그 뒤 2020년에 여야용묘에 관한 신문 보도(読売新聞조간 12.1. 朝日新聞 12.3.)를 본 스기모토 마스미(杉本ますみ) 씨가 이 묘를 연구하여 「우나즈키 전후의 구로베댐 건설공사와 식민지 조선―조선인 묘표의 발견과 그 뒤 《宇奈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희들은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서 귀중한 성금을 보내주신 15만 명이 넘는 수많은 국민 여러분들, 국회의원님들, 네티즌 여러분, 멀리 나라 밖에 계시면서도 우토로를 위해서 온갖 힘을 써주신 여러분들, 위기 때마다 헌신적으로 보도를 해주셨던 방송사, 신문사 등 매스컴 관계자 분들, 그리고 아름다운재단,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지구촌동포연대(KIN)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활동가 여러분들, 이제까지 우토로에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 대한민국이 있어 무서울 것이 없는 용기로 우토로마을의 재건을 위해 힘써왔다는 김교일 회장의 위 인사말을 들은 것은 국치 100년(2010.8.11.)을 맞아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다. 그로부터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토로마을에 조선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 무렵으로 일제는 태평양전쟁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때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함바(노동자가 합숙하던 임시 건물)를 지어 살았다. 서너 평 남짓한 함바에서 대여섯 명씩 숙식을 했던 강제 노동자들의 증언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참한 생활환경이었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