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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조선인 노동자 묘지 – 여야용묘(呂野用墓)

구로3댐의 조선인강제노동현장을 찾아서 <7>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우리는 우치야마(内山) 공민관이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도착했다. 시골 한적한 곳에 자리한 자그마한 1층 건물은 예전 우치야마 소학교(초등학교, 이후 우나즈키(宇奈月) 소학교가 됨)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새로 지은 공민관 안에는 우리나라의 노인정처럼 지역 노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동행한 ㅎ 선생님은 바로 앞에 있는 우치야마역 철길을 건넌 뒤, 물이 나오는 호스를 찾아내어 준비해 온 빈 페트병에 물을 담으셨다. 궁금했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산자락을 오르다 오른쪽 숲으로 조금 들어가니, 이끼 낀 작은 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여야용묘(呂野用墓)’였다. 뒷면에는 ‘朝鮮慶北大丘府明治町’이라 새겨져 있다는데, 글씨는 닳아서 이끼와 때가 뒤엉켜 분간하기 어려웠다.

 

 

여야용묘는 호리에 세츠코(堀江節子) 씨가 조사하여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원제:黒部・底方の声黒三ダムと朝鮮人)》(1992)에 발표했고, 그 뒤 2020년에 여야용묘에 관한 신문 보도(読売新聞조간 12.1. 朝日新聞 12.3.)를 본 스기모토 마스미(杉本ますみ) 씨가 이 묘를 연구하여 「우나즈키 전후의 구로베댐 건설공사와 식민지 조선―조선인 묘표의 발견과 그 뒤 《宇奈月 戦前の黒部ダム建設工事と植民地朝鮮)》(昭和史セミナー, 2021.5.)를 발표했다.

 

여야용은 구로3댐 공사에서 희생된 무연고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죠쇼지(常照寺) 주지 히구치 카즈마루(樋口和丸) 스님에 따르면, 1937년 부친인 히구치 요시노리(樋口惠昇) 스님에게 구로베에서 잡부로 일하던 다나카 이시지로(田中石次郎) 씨와 나카야스 소토지로(中易外次郞) 씨가 여야용 씨의 유골과 소지금을 맡겨서 세우게 된 비석이라고 한다.(堀江節子、《黒三ダムと朝鮮人労働者》、65쪽, 69쪽) 비석 측면에는 “昭和一二年十月九日死亡(1937년 10월 9일 사망)”이라 새겨져 있다. 사고사인지, 병사인지는 알 수 없다.

 

여야용 씨의 유골을 마을까지 가지고 온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로베 협곡의 수평보도(13km)와 일전보도(16km)는 한 발만 헛디뎌도 죽음에 이를 만큼 위험한 길이었다.

 

 

두 일본인은 목숨을 걸고 그 길을 걸어서 여야용 씨의 유골을 우치야마의 죠쇼지까지 가져왔다. 경찰의 눈에 띌 위험도 무릅썼다. 스기모토 씨는,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 여야용 씨의 인간으로 사는 삶의 방식, 사고방식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여야용 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계속 공양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여야용 씨와 두 일본인 사이에는 깊은 인간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杉本ますみ의 昭和史セミナー 발표문, 9쪽)

 

이후 1940년 아조하라다니(阿曾原谷) 눈사태 때 불타 희생된 조선인 무연고자 유골이 숯과 함께 시멘트 포대 두 개에 담겨 와 여야용묘에 합장되었다. 다나카 씨가 다시 유골을 모아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야용묘에는 모두 20명의 조선인 유골이 안치되었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조선인이 구로베 협곡에서 죽었지만, 조선인만의 무연고 묘로는 여야용묘가 유일하다. 구로3댐 공사에서만 300여 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堀江節子, 《黒三ダムと朝鮮人労働者》, 70쪽). 스기모토 씨는 이 20 명의 조선인들이야말로 구로베 전원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오늘날 우나즈키 마을의 토대를 세운 이들이라 평가했다.

 

스기모토 씨는,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언니가 2020년에 조선인묘에 대한 신문 기사를 접하고 참배하러 갈 때 따라갔다고 한다. 그때 언니가 지나치게 슬퍼하는 모습에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여야용묘 앞의 삼나무 틈새로 우나즈키(宇奈月)소학교 자리가 보였고, ‘여기 묻힌 분들도 소학교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두었을지 모르겠다’, ‘조선에서 지낸 어린 시절에는 몇십 년 뒤에 이국의 이름도 모르는 땅에서 외롭게 묻히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을 텐데’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스기모토 씨는, 일본에게 땅과 곡식을 수탈당한 조선인이 군수물자 생산용 전력개발을 하러 ‘생지옥이라는 구로3댐 공사장’으로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인과관계를 지적했다.

 

 

또한, 묘비에 적힌 대구 명치정(明治町)이라는 일본식 지명을 추적해서 원래의 지명이 계산동(桂山洞)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필자는 스기모토 씨의 소망대로 이 주소를 토대로 하여 여씨 종친회를 통해 여야용 씨의 후손을 추적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참배 자리에서 필자는 한국 술을 꺼내어 컵에 따랐다. ㅎ 선생님은 스기모토 씨의 부탁을 받고 꽃과 향을 준비해 오셨다. 묵념을 올리며 나는 당시의 조선 젊은이들을 떠올렸다. 굶주림에 떠밀려 ‘임금을 많이 준다’라는 지옥 같은 공사장을 제 발로 찾아왔거나 강제(1939년 이후)로 끌려와서 겨우 20~30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 그들은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향 땅에 묻혀 이름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묵념을 마치자 ㅎ 선생님은 비석 주위를 돌며 페트병에 담아온 물을 뿌리셨다.

 

 

우리는 “여야용 씨가 아이들이 뛰노는 초등학교 모습을 보며 덜 적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도 없어져 더 쓸쓸하시겠다.”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거꾸로, 그때 뛰놀던 아이들이 지금은 공민관을 드나드는 노인이 되어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아이들을 떠올리며 비슷한 나이였을 젊은 여야용 씨의 넋을 추모했다.

 

 

덧붙이는 글 “여야용 씨 추도식 기사를 보고”

 

10월 9일에 우나즈키(宇奈月) 우치야마(内山)에서 대구출신 여야용(呂野用) 씨의 서거 88주년 추도식이 있었다. 추도식에 참가한 스기모토 마스미(杉本 ますみさん) 씨는 쓰루조노 유타카(鶴園裕) 전 가나자와대학교수를 대표로 한 추도식의 안내문과 기사, 각계의 전문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여야용묘를 세운 죠쇼지(常照寺)의 주지가 계속 공양을 해오다가 주지 사후 2000년대 초부터 여야용묘도 무연고묘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스기모토 씨에 따르면 2020년 여야용묘가 신문에 기사화되어 알려지고부터 다시 공양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과 몇 명이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지역 주민을 포함해 25명이 참가했는데, 지역의 관심이 높아졌고 자주적인 참가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폐쇄적인 지역성으로 볼 때, 이러한 변화는 든든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특히 이번 추도식에서 주목하게 된 것은 다케쿠마 요시카즈 (武隈義一) 구로베(黒部) 시장의 추모 메시지다. 조선인 희생자의 추모식에 메시지를 보내온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데 “구로베강의 전원개발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있다. 극우의 세력이 현실 생활 깊이 영향을 미치면서 역사의 조명을 어렵게 하는 거친 풍조 속에서 용기 있는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다만 여야용 씨는 강제동원 시기 이전에 자발적으로 극한의 노동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한 희생자이지만 나머지 20명은 강제동원이 시작된 1939년 이후에 희생되었다. 시장의 발언에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대한민국 홍인영 부총영사는 도야마 민단의 정광섭 단장을 통해 “강제동원이라는 고통 속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분들의 생을 오늘날 우리들이 기억하는 것은, 과거에 등 돌리지 않겠다는 맹세이고 인간의 존엄을 다시 되살리는 것”, “한일 양국 시민이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평화의 길을 함께 모색하는 의미 깊은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렇게 여야용묘를 통해서 구로베 제3댐의 처참한 공사현장의 원인인 전쟁의 추악함과 피해를 되새기고, 한일이 함께 평화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잊히고 사라질 뻔한 여야용묘를 조사해서 1992년에 밝힌 호리에 세츠코(堀江節子), 여야용묘를 통해 여야용 등 조선인들이 일본의 위험한 공사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밝히고 여야용의 출신지를 당시와 현재의 지도를 자세히 검토해서 추적해 온 스기모토 씨의 연구발표 등이 오늘날 일본인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움직이게 한 것이다.

 

여야용 씨의 추모식을 통해 한일 양국 관계의 정상적인 교류에 희망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