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봄이 온다는 입춘이 지난 뒤에 눈이 내렸다. 봄눈이라 내리자 마자, 쌓이기 보다는 녹아버려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라 생각하며 눈덮인 고궁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정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문화유산적 값어치를 뽐내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은 왕실의 쉼터로, 후원에 들어서면 도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첩첩산중 심산유곡인 듯 자연속에 몰입되는 정원으로, 자연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을 잘 이용하여 곳곳에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원의 특징으로 동양 삼국 가운데서도 인위성이 거의 없는 한국전통정원임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창덕궁 부용정(芙蓉亭)은 부용지를 걸터 앉은 듯 정자의 두기둥을 연못 안에 담그고 있는 건축물로, 아(亞)자형 평면을 한 작은 건축물이나, 그 모습이 매우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지붕 또한 아(亞)자형 평면 위에 올라 앉은 것이라, 회첨골이 많아 아름답지만, 회첨골 주변에 물이 스며들 수 있어, 관리를 잘 해야만 하는 건축물이다. 부용이란 연꽃을 이르는 말로, 연꽃 연못위에 연꽃정자를 지은 샘이다.
부용동 계곡, 크고 작은 자연암반이 계곡에 놓여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587년에 태어나 5살 어린시절, 임진왜란을 겪으며 자란 윤선도는 조선 후기 음악가, 시인, 풍수사, 의사로 한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본관이 해남인으로 정치인으로 고위 관직에도 올라 효종이 죽은 뒤 발생한 예송논쟁의 중심인물로 송시열의 반대편에 서서 논쟁에 가담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인의 맹공에 오랜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윤선도는 소현세자,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현종의 세자시절 이들의 사부였던 덕에 사형은 면하고 유배생활만 하게되었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중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하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런데 제주로 가던 중 보길도에 이르러 지금의 부용동 계곡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어 제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물며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짓고, 산과 바다를 벗삼아 조용히 살고자 하였으나, 인조의 피난 행렬에 호종하지 않았다는 모함에 탄핵받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유배가 끝난 뒤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부용동의 자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