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척 절벽 난간서 강물에 투신한 청심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신기교를 건너면 거문리(巨文里)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구)59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오대천은 길의 왼쪽으로 흐른다. 거문리의 어원을 조사해 보았다. 옛날에는 거문리를 거커리라고 하였는데, ‘큰 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마을에 모양이 마치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文筆峰)이라는 산이 있어서 거커리라고 하였다. 학자를 많이 배출할 지형이라고 한다. 벼농사가 잘 되어 ‘일강릉 이거컬’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거문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둥근 돌탑 2개를 쌓아 놓았다. 돌탑이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거문리 마을이 나온다. 거문리는 넓은 분지 형상인데, 농경지가 많고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다. 우리는 거문리로 들어가지 않고 (구)59번 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번 구간의 종착지인 청심대까지는 멀지 않았다. 장마전선이 중부지방에 걸쳐 있다는데, 오늘은 비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다. 청심대가 있는 곳의 지명은 마평리이다. 마평리는 진부면의 남쪽 방향에 있는 마을로 《조선지지》에 마평리(馬坪里)이고 현재도 마평리이다. 조선 시대 말먹이를
-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 2022-11-10 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