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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한농선 명창, “목 재주보다 소리 공력 묻어나야”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10]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소리꾼 노은주가 90년대 중반, 한농선 명창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흥보가>를 배우며 소리와 함께 발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다행히 노은주는 어려서부터 가야금과 춤을 배웠기에 발림이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농선 명창이 세상을 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던 고 한농선은 그의 부친이 유명했던 가야금 산조의 명인, 한성기다. 한 명인은 19세기 말, 산조(散調) 음악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직접 산조를 배운 뒤, 그 가락을 김창조의 손녀딸(국가문화재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를 지낸 김죽파)에게 전수한 거물급 명인이었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하겠다.

 

아버지 한성기 명인 밑에 한농선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점은 이미 그의 음악적 인자가, 원인을 이루고 있다는, 곧 근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자라면서 더욱 그 요인들을 키워왔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래서 명인 명창 앞에 젊은 소리꾼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농선 명창은 평소 조용하면서도 깔끔했던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노은주는 그의 스승, 한농선 명창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는지 물었다.

잠시도 지체없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어요. 처음 선생님 학원에 갔을 때, 지하의 작은 골방에서 제자들을 지도하시는 모습에 놀랐어요. 선생님은요, 소리는 물론이고, 겸손하시면서도 다정한 마음씨라든가, 조용하시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말씨, 대화, 등등이 반듯하신 분이었지요. 그분의 태도를 닮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선생님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더 자주 뵙고, 그러면서 소리도 배우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그러던 중이었어요,

그 무렵, 단국대 국악과에서 편입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관련 서류를 준비해서 시험에 응하였지요. 그 당시에는 서한범 교수님께서 학과장으로 면접을 담당하시었는데, 저에게 ‘소리 실력이 대단하고 태도가 반듯하다. 꼭 합격해서 우리 학교 학생이 되어 만나게 되면 좋겠다’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지요. 곧 합격통지는 받았으나, 사정상 단국대로 편입을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쉽기만 합니다. 이렇게 교수님이 쓰시는 <우리음악 이야기>에 제가 소개되는 영광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일이지요.”

 

한농선 명창이 기거하고 있는, 같은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선생님과 같이 생활하며 소리를 배울 수 있었던 절호의 편입학 기회를 놓친 그는, 이후 3년 동안을 매주 서울로 올라 다니며 소리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농선 명창은 일요일도 없었다고 전해준다. 모두가 쉬는 일요일도 선생은 소리를 지도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업한 뒤에는 목을 풀러, 연습 방에 들어가서 <백발가>와 <흥보가>를 불렀는데, 제자들에게도 습관적으로 이르는 말씀이 “판소리는 무엇보다도 소리가 중심이어야 된다.”, “아니리(중간, 중간에 말로 하는 대사)나 발림도 판소리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무엇보다도 소리의 공력이 묻어나야 한다.” 또는 “소리 위에 시김새를 넣어 맛있게 꾸미려고 하거나, 목 재주를 부리려 하지 마라.” 등등의 가르침은 그분의 판소리 철학인 듯 보였어요.

 

 

노은주가 기억하는 스승의 주문은 “소리 공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마다 습관적으로 해야 한다”라는 점이었다. 특히 기억에 진하게 남은 말씀은 당신이 연습하던 지하의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서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복습하라”는 권고의 말씀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점이라면, 국가, 아니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판소리 명창의 전승 공간이 고작 <지하의 작은 골방>이었다는 점이다.

 

판소리뿐 아니라 모든 성악은 물론이고, 악기 연습에 있어서도 호흡은 제1의 조건인데 말이다. 예능보유자가 지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지 못한 공공기관의 관심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서 여름휴가를 기해 많은 소리꾼이 그들의 제자들과 더불어 산이나 들에 나가, 맑은 공기 속에서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속히 이러한 사정들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한농선 명창은 평소의 사생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고 전해진다. 함께 생활하며 소리를 배웠던 노은주가 전하는 말이다.

 

“네, 선생님은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씻고, 화장을 하시지요. 잠자고 있는 저를 깨우기 위해 ‘애야, 날이 밝았으니 일어나거라’라는 옛날 어른들의 잔소리 방식이 아니라, 주방에서 일하시며 그릇과 냄비를 딸그락 딸그락 소리를 내시거나, 때로는 창문을 열어 두십니다. 저는 그 소리가 시끄럽기도 하고, 또 춥기도 해서 얼른 일어나야 했어요.”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