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사품 벼슬) 구치곤(丘致崐)이 아뢰기를, "지금 중의 무리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먹고 있으니, 백성에게 해독(害毒)을 끼치는 것이 심합니다. 이들을 군대에 편입시킨다면 군사가 어찌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평안도(平安道) 백성 가운데 중이 된 사람은 다른 도(道)보다 곱절이나 되니, 청컨대 모두 찾아내어 군대의 정원(定員)에 편입시키소서." (가운데 줄임) "지난 정해년에 호패(號牌)를 시행하였을 때도 중의 무리가 30여 만 명이나 되었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지금은 거의 40여 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위는 《성종실록》 111권, 성종 10년(1479년) 11월 29일 치 기록입니다. 중의 무리가 40여 만 명이나 돼 군사가 넉넉하지 않다고 하며, 중들을 군대에 보내도록 하자고 합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가 되자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바뀌면서 불교를 탄압하고 이에 따라 따라서 불교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262칸에 달하던 대가람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융성하였습니다. 다만, 그렇게 번영했던 회암사는 현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지난 9월 24일부터 내년(2025) 2월 2일까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 ‘양주회암사지박물관’에서는 특별전 <대가람 회암사 262>를 열고 있다. 양주 회암사터 유적은 동아시아 불교에 유행했던 선종사원의 전형을 증명하는 값어치가 인정되어 지난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유산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융성하게 번영한 회암사는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옛 회암사의 모습을 증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가 바로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다. 이번 전시에서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 안에 담긴 옛 회암사의 모습과 세계유산으로의 값어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전 <대가람 회암사 262>는 3부로 펼쳐진다. 먼저 제1부에서는 고려 왕실이 지향한 이상적 도덕 정치 그 중심에 있던 회암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를 억압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자리를 굳게 지켰고, 태조 이성계와 효령대군 그리고 정희왕후까지 많은 왕실 인사들이 회암사의 중창을 주도하며 회암사는 전국 으뜸의 대가람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제2부는 조선의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서울의 동북쪽인 경기도 양주에 한 때는 삼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규모가 컸던 회암사(檜巖寺) 터가 있는데, 중심 전각인 보광전(普光殿) 터에서 <‘효령대군(孝寧大君) 덕갑인오월(宣德甲寅五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수막새> 여러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수막새 가운데 범어인 ‘옴’자가 있고 글자 좌우에 효령대군’이, 하단에 ‘선덕갑인오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를 설명하면, ‘효령대군(1396∼1486)’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의 둘째 형으로 불교를 옹호한 대표적인 왕실 인물이고, ‘선덕’은 중국 명나라 선종(宣宗, 재위 1426~1435)의 연호로, 선덕연간 중 갑인년은 1434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수막새는 1434년 5월에 제작되어 보광전 기와로 사용되었으며, 효령대군은 수막새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보광전 불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왕자 이름이 왜 사찰 수막새에 등장했을까? 조선시대의 특징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공식처럼 외워왔는데,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인 대군이 무슨 연유에서 절 수막새 제작에 관여했을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