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없지만 머릿속에는 그 책이 누구 손에 몇 년 동안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오. 그리고 그 책을 누가 지녔는지, 그리고 어느 판본이고 누가 주석을 달았는지도 꿰고 있으니까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 책들은 모두 내 책이란 말이오. 세상에 책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을 거외다.”
위 내용은 정약용이 쓴 《조신선전(曺神仙傳)》에 나온 책쾌 조생이 한 말입니다. “책쾌(冊儈)”란 조선 영조 때부터 거의 조선 말기까지 활약했던 책 거간꾼을 이릅니다, 그런데 책쾌는 단순한 책 거간꾼이 아닙니다.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닌 책을 수 없이 읽고 사는 사대부들이었기에 그들과 소통을 하려면 그들만큼의 지식을 가져야만 했던 또 하나의 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 조선시대 “책쾌(冊儈)”는 지식을 파는 또 하나의 지식인이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리고 그들은 누가 어떤 책을 필요로 하는 지도 꿰뚫고 책을 은근히 권하기도 하는 등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작은 도서관 하나가 들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책쾌들은 수요가 많은 책 특히 여성들이 좋아했던 패관문학(稗官文學, 설화ㆍ가전체문학ㆍ고전소설 등)의 경우는 필사를 해서 빌려주기도 했고, 찾는 사람이 많아서 필사를 할 수가 없을 정도의 책은 직접 민간에서 목판을 찍어 책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책쾌들은 영조 때 명나라에서 건너 온 《명기집략(明紀輯略)》이라는 책 한권에 연루되어 100여 명이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왕실의 정통성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영조의 진노를 샀던 것입니다. 《조신선전》의 조생은 신선이란 별명답게 난리 통에 슬쩍 몸을 숨겼다가 몇 해 뒤에 한양에 돌아와 품속에 책을 넣고 다시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쾌들도 근대에 들어서 인쇄기가 들어오고 출판사가 생기며, 서점이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