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채바다 삼별초뱃길탐험대장] 1271년(원종 12년) 5월, 진도가 여⋅몽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탐라로 이동한 김통정은 1년여 지난 1272년 3월부터 전라도 연안에 대한 군사 활동에 이어서 차츰 충청․경기 서해 연안으로 세를 확장하면서 개경까지 위협하는 본격적인 공략을 펴 나갔다. 또한 1273년에 들어서자 몽골군이 주둔해 있던 경상도 연안까지 세력을 확대할 정도로 전 국토로 세를 키워 나갔다. 삼별초는 이처럼 여러 섬과 고을들뿐만 아니라 군현 관아까지 공격하여 수령을 잡아가자 고려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별초의 세력 확산으로 개경정부는 위협을 느껴 곧바로 전함병량도감을 설치하여 삼별초 공격에 맞섰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항쟁결의 |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항파도성의 축성
1271년(원종12년) 11월, 고려정부는 이창경과 문선열을 원나라에 보내서 “탐라에 들어간 삼별초들이 남해 여러 섬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장차 이들은 육지로 상륙할 염려가 있으니 섬멸에 적극 나서달라.‘라고 요청할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처럼 삼별초는 탐라에서 벌이는 싸움과는 별도로 영호남 섬 뿐만 아니라 육지로 상륙 관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들의 규모와 저항은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다. 각처에서 별동대들이 그 위력을 발휘 하고 있다. 탐라에 상륙 한 김통정 이외에도 별도로 이들의 활약상들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
여몽 연합군으로써는 한 순간도 삼별초의 대항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도가 진압되고 더 이상 반항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크게 빗나갔다. 쿠빌라이는 삼별초의 계속된 항거가 자신들의 일본 원정 계획에 치명타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삼별초 진압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탐라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인명피해와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막강한 여몽 연합군을 앞세운 쿠빌라이는 탐라에 상륙한 삼별초를 철저히 섬멸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들을 진압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전력 증강을 위한 시간을 벌고 이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원종 1272년 3월 금훈을 ‘탐라역적초유사(逆賊招諭使)’로 임명하여 산원 이정과 함께 탐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역풍을 만나 보마도(甫麻島)에 정박했는데 삼별초 선단에 발각되어 추자도에 억류되고 초유문서는 김통정에게 보내졌다. 김통정은 회답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후 풀어주었다.
“너희들은 일찍이 사람을 진도에 보내어 우리를 유혹하며 마음을 늦추게 하고는 대군을 끌고 와서 공파하였다. 우리의 부모처자는 물론, 모든 것을 잃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바이다. 이제 또 우리를 멸하고자 유혹하니 마땅히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로되,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전할 것이냐. 그러므로 너희를 놓아주는 것이다.”
목숨을 건진 금훈은 곧바로 원나라로 들어가 삼별초를 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무력으로 평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여․몽 연합군은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곧바로 탐라를 공략하지 않고 배를 건조하고 시간 벌면서 회유하는 양면 전략을 세웠다. 홍다구는 김통정을 설득하기 위해 김통정의 조카 김찬과 이소 환문백 등 5인을 보냈다. 김통정은 김찬만 남기고 모두 참하였다.
삼별초의 의지를 확인한 연합군은 더 이상 탐라에 대한 군사적인 조처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격할 준비가 되자 원종 1273년 2월 심남현(지금의 나주)에 집결하여 진도 공격 때와 같이 중군과 좌ㆍ우군의 3군으로 편성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변덕스런 해상 날씨로 순조롭지 못 했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함덕포 상륙 |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삼별초의 최후혈전
3월 하순, 본격적인 침공을 위해 서해 도서로 나갔던 병선 20척과 경상도 병선 27척이 임자도(가야소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모두 침몰되었고 동시에 수군 115명도 모두 수장되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서해도 안찰사 우천이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 이런 사고에도 공략에 나선 병선 1백 60척은 추자도에 도착하였다. 4월 28일 12,000여 명의 여⋅몽연합군은 항파두성 서북쪽, 비양도, 함덕포에 상륙하였다.
명월포, 군항포로 나뉘어 공격한 연합군은 항파두리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김방경은 삼별초 지휘부 김원윤 등 6명을 공개 처형하고 지휘관급 35명과 사졸 1,300여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 인하여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 전원이 연합군 포위망이 점차 좁혀오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제주도민의 고난 |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의 벽화 / 몽골군의 최우
이렇게 삼별초군을 진압한 뒤 몽골군 5백, 고려군 1,000명 모두 1천5백을 투입하여 삼별초 잔여세력 소탕과 치안유지 등을 맡도록 했다. 몽골은 탐라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루가치를 파견함으로써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삼별초에 대한 전공으로 김방경은 시중에 올랐고, 변윤(邊胤)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김석(金錫)은 상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나유와 송보연은 대장군으로 승진됐다.
김방경이 삼별초 진압을 끝낸 것은 4월 28일이다. 그러므로 여⋅몽연합군이 영산강 중류의 나주 반남현에서 4월 9일 출정하여 시작한 탐라 소탕작전은 대략 20일 만에 끝난 셈이다. 그런데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탐라에 상륙한 여⋅몽연합군과 송담천에서 전투를 벌일 때까지 주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