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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 서사”를 맹세하라는 남산의 <조선신궁>

[맛있는 일본이야기 319]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0월 15일은 조선신궁 진좌제(신을 맞아들이는 행사)의 날이다. 내지인(일본인)도 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배전(신전)의 앞까지 가자 내지인은 모자를 벗고 절을 하고 조선인은 휙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 단 한사람의 조선인도 참배하는 자는 없었다. 《해외신사사》, (1953, 小笠原省 지음)

그런데도 《조선과 건축, 1925.11》에는 조선인이 조선신궁의 건립을 매우 기뻐하며 반긴 듯이 적고 있다. “반도 1,700만 백성의 수호신인 조선신궁은 경치가 뛰어난 남산 허리에 신성한 땅을 골라 어진제가 감행된다. 우리 반도 주민은 기뻐 춤추는 것을 그칠 수가 없으며 이것은 조선 병합의 뜻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고운 빛깔을 더하는 것이다.”

설마 조선인이 일본의 신을 모시는 신사 건립에 두 손을 들어 환영했을까?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친일파거나 민족 반역자였을 것이다. 훗날 친일문학가로 전향한 김기진(1903∼1985)조차도 “지금 나의 불평과 울분의 궁극의 도착지는 다만 한곳 밖에는 없다. 모든 것이 밉다. 남산 위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나는 남산이 밉다. 남산이 미워서 못 견디겠다.” 고 했을 정도다. 그만큼 남산은 조선인들의 가슴에 신성하고 친근한 어머니 같은 푸근한 산이었고 목멱신이 한양을 지켜주는 그런 믿음직한 산이었던 것이다.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조선신궁 전경도

그러나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사랑 받던 남산 언덕에는 조선신궁이 들어서고 주변에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류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또한 남산을 둘러싼 동서남북에는 왜성대공원, 한양공원, 장충단공원 등을 만들어 제국주의 거류민의 행락과 휴식지로 만들었다. 특히 장충단 공원은 조선의 군사시설인 남소영 터에 고종이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격인 장충단(1900년)을 설립하였는데 신성한 제전의 터인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말았다

1925년 10월 15일은 새로 세운 조선신궁에 신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일제는 이를 경성의 가장 큰 행사로 화려하게 기획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3일 경성역에서는 조선신궁에 모실 신체(身體)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오는 열차가 도착하였다. 이는 경성역 개장이래 첫 열차 운행이었다. 진좌제가 열리는 날 일본 동궁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여 건립된 경성운동장도 개장하였고, 이튿날부터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열렸다. 조선인들이 일본 신 앞에서 경기를 펼치게 한 것이었다.

조선신궁은 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와 1912년에 죽은 명치왕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세웠으며 기존에 남산 마루에 있던 국사당(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개인 사당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조선신궁 외에도 일제는 남산 주변에 노기신사(1934), 경성호국신사(1943) 등을 세워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10월 15일은 90년 전 한양의 신성한 목멱산에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조선신궁이 세워졌던 날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조선신궁에 조선사람은 참배하지 않았다."(서울역사박물관)

   
▲ 남산 주변에 있엇던 노기신사의 손 씻는 수조(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