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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푹 들어간 포구와 조천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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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에서 본 조천진성과 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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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구 안 마을에서 본 조천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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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위에서 본 마을과 해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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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 마을에서 본 조천진성과 연북정 하늘에는 갈매기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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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안에서 본 조천진성 망대 연북정. 구름이 피어나는 하늘이 변화무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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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안 연병장에서 본 연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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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위에서 본 바닷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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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북정이 있는 조천진성 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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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진성의 망대 연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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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북정 현판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시 동북쪽 해안가에는 조천진성이 있다. 조천이란 말은 옛날 기원전 3세기 진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서불(서복)이 이곳에 당도하여 천기를 보고 그가 바위에 새긴 글자가 조천(朝天)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조천이란 하늘을 관측한다는 의미 또는 천자의 나라에 조예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전해오던 그 글자는 고려시대 조천관을 지으면서 땅 속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조천포구는 옛날에는 육지에서 이곳 제주로 오는 길목이었다. 그리하여 포구로 드나드는 배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작지만 성벽을 두르고 군사를 배치하여 드나드는 배들을 지키고, 조선 초부터 왜구 등의 출몰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조천진성의 누대 위에는 다른 성의 장대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작은 정자를 짓고 1590년 23년인 선조 이곳에 부임했던 절제사 이옥후가 성을 확충하고 정자를 지어 쌍벽정이라 불렀는데, 1599년 정유왜란이 끝난 후 그 정자의 이름을 연북정(戀北亭)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연북이란 이곳이 조선시대 육지에서 제주로 귀양오는 사람들이 북쪽 한양에 있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북쪽 육지로 오가는 포구인 이곳이 한양과는 그래도 가장 가까운 곳이니, 한걸음이라도 가까운 이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귀양이 풀려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나가기를 학수고대 하던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새롭게 개발된 제주항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하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고 하니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봄기운이 감도는 2월 말이지만, 아직도 거센 제주바람은 성벽 위에 올라서면 사람을 날려버릴 듯 거세다.성벽에 올라 주변 마을과 바다를 돌아보니 아직 때묻지 않은 제주의 풍광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주변에는 2층을 넘는 집도 없었고, 바닷가 주변에는 울긋 불긋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처음 보는 곳이지만 정이 듬뿍 들었다.
높이 3미터에 전체길이 200여 미터에 이르는 작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천진성에는 옛날 귀양온 선비들이 한양을 그리워하는 그리움도,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왜구들에 대한 두려움도, 망망대해 거친 파도에 무사와 안녕을 바라는 염원도 느낄 수 없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였다.
지금이 바야흐로 태평성대인 때문인가? 아니면 세월이 변한 때문인가?
바람도 세차게 부는 날 성곽 주변을 둘러보고 포구를 둘러보니 어느새 배가 촐촐하였다. 성주변에는 작은 구멍가게만 있을 뿐 쓸쓸하기 그지 없어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300여 미터 큰 길 옆에는 식당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백리향이라는 식당의 백반정식은 값도 싸고도 맛깔스러운 집이었다. 조천진에 간다면 들러도 실망하지는 않을 정겹고 푸짐한 제주 인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