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가면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라는 못 곧 저수지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지요. 그러나 이때는 이곳이 신라가 아닌 백제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신라가 만든 것처럼 고쳐놓았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 |
||
▲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전경(문화재청 제공) |
지금 이곳에는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둑이 현재 남아 있으며 딸림 시설로 둑의 남단 수문터였던 경장거(經藏渠)와 북단 수문터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터였던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습니다. 다만 이 둑도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요.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1975년에 못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 하였는데,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또 이 벽골제는 부분적인 개수공사가 후대에 이루어지긴 했지만 3km에 달하는 둑과 거대한 수문 돌기둥들로 보아 처음 둑을 쌓았을 때부터 거대한 규모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못으로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벼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을 갖추었던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 |
||
▲ 김제 벽골제 수문(문화재청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