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폴론나루와 이윤옥 기자] “스리랑카에 부처님이 첫 발걸음을 하신 것은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아홉 달 만의 일입니다. 2500여 년 전 당시 인도와 스리랑카는 지금처럼 바닷길을 건너야하는 육지와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이었지요. 현재도 인도와 스리랑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22킬로밖에 안됩니다. 당시 부처님은 남인도 타밀족(Tamil族)과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지요. 이후 두 번째 방문은 8년 뒤의 일입니다.”
어제(2월 1일) 아침에 찾은 마히양거나(Mahiyangana) 사원의 주지 남므라타나 스님은 기자에게 이 사원의 유래를 그렇게 말했다. 그제(1월 31일) 밤 캔디의 불치사(佛齒寺)를 들려오느라 밤늦게 마히양거나 사원에 도착한 기자 일행은 밤 8시가 다되어 주지스님을 잠깐 뵙고 다시 이튿날인 어제 정식으로 찾아뵌 것이었다.
남므라타나 스님 말대로라면 이 절은 2531년(올해 불기)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부처님이 인도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1년이 채 안된 9달 뒤에 스리랑카의 이곳 마히양거나를 찾은 기념으로 생긴 이 절의 역사는 곧 부처님의 역사 그 자체이건만 스리랑카에서는 그다지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부처님이 첫 발자국을 찍은 감동스런 곳이건만 스리랑카의 관광유적지 지도에는 나와 있지 도 않다. 오히려 이곳에서 65킬로(승용차로 2시간 여 거리)떨어진 캔디(Kandy)의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가 더 유명하여 연중 관광객들로 붐빈다.
“불자가 아니라도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얻은 뒤 첫 방문지라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 관광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이곳을 적극 홍보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또한 일본에 불교가 첫발을 내딛은 아스카(飛鳥)의 아스카절(飛鳥寺)가면 한글로 아스카절의 유래를 적어 놓은 전단이 있던데 혹시 이 사원에도 한글 전단을 만들 생각은 없으신지요?"
기자의 질문에 주지스님은 현재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고 있는데 스리랑카말과 영어로 구축 중이지만 앞으로 한국말과 종이 전단도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1시간여 동안 절의 유래를 스리랑카말로 자세히 들려주었지만 통역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데다가 이 절이 생길 무렵의 생소한 왕조 이름 등이 등장하여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던지라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사원의 관광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면 외국인들로서는 접근이 어려운 점이 있다고 본다. 친절한 남므라타나 주지스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찾은 곳은
고도(古都) 폴론나루와(Polonnaruwa) 유적지다. 부처님이 첫 발자국을 찍은 마히랑거나 사원에서 차로 2시간 여 달린 곳에 자리한 이곳은 13세기의 찬란한 불교사원과 더불어 왕궁유적(Royal palace)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 손꼽히는 스리랑카 관광코스의 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도 인도 타밀족의 침략전쟁으로 상당수가 파괴된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전쟁을 치룬 느낌을 준다. 목 잘린 불상, 팔다리가 잘린 불상, 허리가 잘린 불상 등 보기에도 처참한 불교 유적지를 파괴한 사람들은 흰두교를 믿는 타밀족들이 저지른 일이다.
니산카말라(Nissankamalla, 1187-1196) 왕조 때의 화려한 불교 유적은 폴론나루와(Polonnaruwa) 유적지의 백미지만 거의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남아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인도의 침략에 견디다 못한 싱할라 왕조에 의해 1293년 밀림 속에 버려졌던 이 유적지는 1900년도에 들어서서 유적 발굴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5백 년 동안이나 밀림 속에 방치돼 있던 거대한 불교 유적지 폴론나루와 지역을 돌아보면서 스리랑카의 불교 수난사를 온 몸으로 느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13세기 원나라의 침입으로 고려 불교 유적이 한 차례 수난을 겪은 데다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고비고비 마다 전쟁의 수난을 겪어야했던 한국불교사를 보는 것 같아 더욱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갈위하라(바위법당) 유적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당시 모습, 죽은 어머니를 위한 설법 모습, 열반전의 모습, 와불 모습의 열반상 등 4개의 거대한 불상들이 손상을 입지 않고 있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부처님의 일생과 거의 같은 불교 역사를 지닌 스리랑카의 불교유적지는 이르는 곳마다 서양인들의 단체 관광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으나 한국인 단체 관광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스리랑카처럼 긴 불교역사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불교문화 유산을 간직한 한국인들에게 스리랑카 여행을 권하고 싶을 만큼 스리랑카는 불교유산의 보고(寶庫)다. 내일은 또 다른 유적지 담불라 쪽으로 이동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