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는 ‘굿’이라는 낱말의 뿌리와 가지를 가늠하지 못하여 뜻의 차례를 거꾸로 내놓은 것이다. “무속의 종교 제의.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귀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여 달라고 비는 의식”이라고 먼저 풀이한 다음에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거나 신명 나는 구경거리”라고 해야 뜻의 뿌리와 가지를 올바로 내놓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굿의 뿌리를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귀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여 달라고 비는 의식”이라 해 놓은 것은 요즘의 굿만을, 그것도 껍데기만 보고 적어 놓은 것이다. 굿은 우리 겨레와 더불어 길고 긴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굿’이라는 낱말의 뜻을 풀이하려면 그런 세월의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굿의 본디 모습은 중국 사람들이 저들의 역사를 적으면서 곁눈질한 자취로 변죽만 간신히 남아 있다. 예(濊)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마한의 ‘천신제(天神祭)’, 고구려의 ‘동맹(東盟)’ 같은 것들이 그것인데, 이때 굿들은 ‘무당’이 혼자서 ‘귀신’에게 ‘복이나 달라고 비는’ 노릇이 결코 아니었다. 굿을 이끄는 무당이야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느님’께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큰 은혜를 고마워하는’ 노릇이 굿이었다.
한 해 농사를 끝내고 가을걷이를 마무리한 다음 ‘고마운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제천(祭天)]’가 본디 굿의 뜻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어우러져 밤낮없이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느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것이 본디 굿의 모습이었다. 이런 굿을 바치며 하느님을 믿고 살던 시절에 우리 겨레는 요하를 중심으로 중국의 황하나 양자강보다 훨씬 먼저 문명을 일으켜 동아시아를 이끌며 살았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 무제에게 요하 서쪽을 빼앗기며 고조선이 무너진 다음에 일어난 열국 시대 뒤로, 지도층이 불교와 유교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하늘을 믿으며 바치던 굿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신라 법흥왕이 온 나라를 부처님의 땅으로 만들자고 나선 뒤로, 굿은 거의 천 년 동안 불교에 짓밟히며 온갖 서러움을 다 받았다. 그리고 이른바 신흥사대부 세력이 조선 왕조를 세운 뒤로, 굿은 다시 오백 년 동안 유교에 짓밟히며 발붙일 터전을 거의 빼앗겼다.
게다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서양을 천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면서, 굿에다 ‘미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도록 쓸어 내려고 들었다. 이처럼 굿을 짓밟아 몰아낸 일천오백 년 세월에 걸쳐 요하는 물론 만주 드넓은 땅은 모조리 중국에게 빼앗겼고, 우리 겨레의 삶은 중국의 아류를 지나 일본의 종살이로까지 굴러떨어졌다.
굿은 본디 목숨을 주고 삶을 주시는 하느님께 믿음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신도),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힘을 지닌 무당(사제),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들을 만나러 내려오는 서낭(신격)이 함께 빚어내는 제사며 잔치다.
제사며 잔치이기 때문에 사람인 신도와 무당인 사제와 서낭인 신격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말씀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서낭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경전)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거룩한 서낭님이 머물러야 하므로, 굿판은 반드시 거룩한 자리(성전)로 깨끗하게 갖추어야 한다. 이처럼 굿 안에 갖추어진 ‘신도, 사제, 신격, 경전, 성전’이란 곧 종교의 기본 요소들이다.
그러니까 굿은 하나의 종교 의식이다. 우리 겨레가 태초부터 하느님께 믿음을 걸고 바치던 남다른 종교 의식이며 신앙 의식이다. 세상의 참되고 올바른 종교가 모두 그렇듯이, 우리 겨레의 굿도 사람을 진리와 사랑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도록 이끌며 북돋워 준다.
서낭을 통하여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이 진리와 사랑에 머물도록 격려하고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굿에서 하느님은 서낭으로 하여금 사람이 진리와 사랑에 머물지 못하도록 이끄는 ‘잡귀’와 ‘잡신’을 떼어 내고 물리치게 해 주신다. ‘잡귀와 잡신’이란 사람과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으며 사람이 하느님을 버리고 거짓과 미움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