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요즘 젊은 사람들이 ‘쪽팔린다’는 말을 널리 쓴다. 귀여겨들어 보니 ‘부끄럽고 쑥스럽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었다. 누가 맨 처음 그랬는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니 아주 재미있는 말이다. 이때 ‘쪽’은 반드시 ‘얼굴’을 뜻하는 것일 듯하니, 한자 ‘면(面)’을 ‘얼굴 면’이라고도 하고 ‘쪽 면’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팔린다’는 말은 값을 받고 넘긴다는 뜻이니,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려서 제가 어찌해 볼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쪽팔린다’는 말은 ‘얼굴을 어찌해 볼 길이 없다’는 뜻이다. ‘얼굴을 못 든다’거나 ‘낯 깎인다’거나 ‘낯 뜨겁다’거나 하는 말들이 일찍이 있었는데, 이제 새로 ‘쪽팔린다’는 말이 나타나서 우리말의 쓰임새를 더욱 푸짐하게 만들었다. 우리말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쪽’이 있다. ‘무엇이 쪼개진 조각의 하나’라는 뜻으로 “그 사과 한 쪽 먹어 보자.” 하고, ‘시집간 여자가 땋아서 틀어 올린 머리’라는 뜻으로 “쪽을 찌고 비녀를 꽂으니 예쁘구나!” 하고, ‘여뀟과에 드는 한해살이풀의 하나’로 “쪽빛 물감이 참으로 예쁘다.” 하고, ‘책이나 공책 따위의 한 바닥’이라는 뜻으로 “그럼 이제부터 아홉째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여보’라는 낱말을 모르는 어른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라도 너덧 살만 되면 그것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부를 때에 쓰는 말인 줄을 안다. 국어사전들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에 앞서 “허물없는 사이의 어른들이 서로를 부르는 말”이라는 풀이를 내놓고 있다. ‘여보’라는 말을 요즘에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 부르는 말로 많이 쓰지만, 지난날에는 ‘허물없는 사람끼리 서로 부를 적에 쓰는 말’로 더욱 많이 썼기 때문이다. ‘여보’는 본디 ‘여보십시오’, ‘여봅시오’, ‘여보시오(여보세요)’, ‘여보시게’, ‘여보게’, ‘여보아라’ 같은 낱말에서 ‘~십시오’, ‘~ㅂ시오’, ‘~시오’, ‘~세요’, ‘~시게’, ‘~게’, ‘~아라’와 같은 씨끝을 잘라 버린 낱말이다. 그런데 ‘여보’의 본딧말인 ‘여보십시오’, ‘여보아라’ 따위도 애초의 본딧말은 아니다. 애초의 본딧말은 ‘여기를 좀 보십시오.’나 ‘여기를 좀 보아라.’ 같은 하나의 월이었다. ‘여기를 좀 보십시오.’가 ‘여기를 보십시오.’로 줄어지고, 다시 ‘여기 보십시오.’로 줄어졌다가 마침내 ‘여보십시오.’로 줄어진 것이다. ‘눈을 돌려서 여기를 좀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느낌과 생각과 뜻이라는 마음의 속살들은 몸에서 말미암지만, 마음 안에는 몸에서 말미암지 않는 속살이 있다. ‘얼’이 바로 그것이다. 얼은 몸에서 말미암지 않으므로, 사람은 스스로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얼’이라는 낱말이 있다는 것은, 우리 겨레가 그것의 있음을 알고 살아왔다는 말이다. 몸으로는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는 말과 마음으로는 그것이 있는 줄을 알았다는 말은 서로 어긋난다. 그러나 이런 어긋남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신비가 아닌가 싶다. ‘얼’이라는 낱말의 쓰임새를 살피면 그것이 마음의 참된 속살이라는 것을 알 만하다. ‘얼간이’, ‘얼뜨기’, ‘얼빙이’, ‘얼빠졌다’ 이런 낱말의 쓰임새가 바로 ‘얼’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얼간이’는 [얼+간+이]로 쪼갤 수 있는 낱말로, ‘얼이 가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이 어딘가 나들이를 가 버리거나 아예 제자리를 비워 두고 나가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뜨기’는 [얼+뜨+기]로 쪼갤 수 있는 낱말로, ‘얼이 하늘 높이 뜬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이 몸 바깥 허공으로 떠 버려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