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처럼 바짝 마른 땡볕더위를 ‘무더위’라고 떠드는 것은 틀림없이 ‘무더위’라는 낱말의 뜻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싶어서, 가까이 만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무덥다’라는 낱말의 뜻이 뭡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거의가 ‘매우 덥다’, ‘몹시 덥다’, ‘아주 덥다’ 같은 껍데기 뜻풀이 대답뿐이었는데, ‘무’라는 앞가지에 무게를 두어서 ‘무섭게 덥다’ 하는 놀라운 대답도 나왔다. 그러니까 ‘무더위’는 ‘무서운 더위’라는 것이다. 놀랍기는 놀라운 대답인데, 우리말의 신세가 이처럼 버림받았는가 싶어서 놀라웠다.
국어사전들이 뜻풀이를 잘못해서 그런가 싶어 뒤적여 보았더니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1) 몹시 찌는 듯한 더위.
2) 물쿠면서 기온이 높은 더위.
3) 습도와 온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
뜻풀이를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풀이에 쓰인 말을 요즘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일테면 ‘찌는 듯’, ‘물쿠면서’ 같은 우리말의 뜻을 요즘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 같고, ‘습도와 온도’ 같은 일본말의 뜻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잖을 것 같았다.
찌는 것이 ‘물을 펄펄 끓여서 솟구치는 김에다 먹거리를 익히는 노릇’이고, 물쿠는 것이 ‘더위로 땅이 한창 달아 있는데 큰비가 오려고 짙은 구름이 땅으로 내려앉을 적에 온몸에서 땀이 끈끈하게 비집고 나오는 느낌’이고, 습도와 온도가 ‘축축하기와 따뜻하기’라는 뜻을 제대로 안다면 ‘무더위’의 뜻을 요즘처럼 이렇게 헷갈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무더위’는 한마디로 [물+더위]다. ‘물’과 ‘더위’가 함께 어우러졌다는 뜻으로 생긴 낱말이다. 그러니까 ‘무더위’는 더위 기운 때문에 땀이 나는데 물기 때문에 축축하기도 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럴 적에 더위의 힘이 낮으면 ‘눅눅하다’는 느낌을 일으키고, 더위의 힘이 높으면 ‘후텁지근하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더위’는 더위의 힘이 높은 쪽에 더욱 알맞게 쓰인다. 어쨌거나 ‘무더위’는 더위 가운데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더위가 아닌가 싶다.
말이 난 김에, ‘물’이 앞가지로 붙어서 ‘무’로 바뀌어 만들어 진 낱말들을 꼽아 보고 싶다.
큰물이 지면 물이 넘쳐 흘러가도록 낮은 목을 이룬 방천인 ‘무너미(무넘기)’, 바람이 일어 물낯바닥이 잔잔히 물결을 이루는 ‘무노리’, 물을 가득 실어놓은 논이거나 언제나 물이 빠지지 않아서 물이 가득 차 있는 ‘무논’, 닭처럼 생겨서 물에서 사는 뜸부기의 다른 이름인 ‘무달기(무닭)’, 공기에 가득 차 있는 물기 때문에 해나 달 가장 자리에 하얀 테를 두른 듯한 ‘무리(달무리, 햇무리)’, 손등 같은 곳에 생기는 사마귀 가운데 단단히 여물지 않은 ‘무사마귀’가 있다.
또 물렁물렁하고 부은 듯이 허옇게 찐 ‘무살’, 물을 가득 실은 논에 쟁기질과 써레질을 하여 흙을 고르는 ‘무삶이’, 뿌리를 뽑아서 말리거나 가공하지 않은 채 물기가 있는 인삼인 ‘무삼(수삼)’, 늦가을 처음으로 서리가 내릴 적에 아직 물기가 온전히 얼지 않은 ‘무서리’, 물을 좋아하여 거의 물에서 살아가는 소의 한 갈래인 ‘무소(코뿔소)’, 광산에서 캐낸 철광을 처음으로 녹여서 단단하기가 덜한 ‘무쇠’,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의 물심부름을 맡았던 종인 ‘무수리’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물이 흔하다고 붙여진 마을 이름인 ‘무실(수곡)’, 물에서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곤두박질을 하는 ‘무자맥질’, 물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도록 거꾸로 도는 물레방아처럼 만든 ‘무자위’, 물에서 살아가는 뱀의 이름인 ‘무자치(무자수)’, 발가락 사이에서 좀처럼 살을 삭히며 물기를 내는 ‘무좀’, 무논에서 일할 적에 입도록 만든 잠방이인 ‘무잠뱅이’, 비 온 뒤에 하늘에 떠 있는 물기에 햇빛이 꺾이면서 일곱 가지 빛깔이 둥글게 테를 이루어 보이는 ‘무지개’, 물 담은 통을 짊어질 수 있도록 지게처럼 만든 ‘무지게’.
이처럼 앞가지에 ‘무(물)’를 붙여 만든 낱말이 많은데, 마지막에 보인 ‘무지개’와 ‘무지게’는 맞춤법이 좀 못마땅하다. 뒤에 있는 ‘무지게’의 ‘지게’는 짐을 짊어질 수 있도록 만든 기구이므로 ‘지개’라야 올바르고, 앞에 있는 ‘무지개’의 ‘지개’는 사람이 드나들도록 만들어 놓은 문이기에 ‘지게’라야 올바르기 때문이다. ‘지다’와 같은 움직씨의 줄기 ‘지’에 붙어서 그런 움직임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뜻의 뒷가지는 ‘애(개)’이기 때문에 ‘지개’라야 올바르다. 그러니까 물을 져다 나르도록 만든 것은 ‘무지게’가 아니라 ‘무지개’라야 맞다.
그러나 비온 뒤에 날이 개면서 하늘에 떠 있는 물기에 햇빛이 꺾이면서 일곱 가지 빛깔이 둥글게 하늘을 가로질러 테를 이루는 그것은 ‘무지개’가 아니라 ‘무지게’라야 올바르다. 여기서 말하는 ‘지게’는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뜻하는 우리말인데, 보다시피 ‘문’이라는 한자말에 짓밟혀 이제는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그러니까 ‘무지게’는 하늘에 떠 있는 물기로 만들어 낸 하늘 지게(문)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