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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색(色)”만 남고 우리말 “물”은사라져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 13]

[우리문화신문=김수업 명예교수]  우리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회보에 실리는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신정숙 선생님이 쓴 <적색과 아이보리>도 아주 재미있게 읽고 여러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빛깔을 뜻하는 우리말이 한자말과 서양말에 밀려서 아주 자리를 내놓고 말았으니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걱정이었지요.

 

우리 겨레가 스스로 만들어 쓰는 토박이말이 중국말에 일천오백 년, 일본말에 일백 년, 서양말에 오십 년을 짓밟혀 많이도 죽었지요. 그렇게 죽어 버린 우리말들을 갈래에 따라 살펴보면 좋은 공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의 주검들을 어루만지며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겨레의 삶을 뉘우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신 선생님이 반물이라는 낱말의 참뜻을 몰라서 애태운 것 때문입니다. 국어사전들이 반물을 올림말로 싣지도 않았으니 어디서 참뜻을 알아보겠습니까? 애를 태운 끝에 찾아낸 것이 반물은 암키와색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암키와든 수키와든 빛깔이야 다를 게 없으니, “반물색이라 하기보다 기와색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랬지요?

 

그런데 그건 우리네 국어사전들이 모두 엉터리라서 그렇게 되었어요. ‘반물을 싣지도 않은 국어사전들이 을 실어 놓고 거기에 암키와라는 뜻이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암키와를 뜻하는 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 글자일 뿐입니다. 국어사전들이 알밤 같은 우리 낱말 반물은 싣지도 않고, 아무도 쓰지 않는 중국 글자를 우리 낱말이라고 실어 놓았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중국 글자로 암키와는 이고 수키와는 이지요. 우리말 반물은 그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말 은 바다에 사는 꼴뚜기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반물꼴뚜기의 물이지요. 꼴뚜기란 놈이 위태롭다고 느끼면 내뿜는 검푸른 먹물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꼴뚜기를 잡으면 그 검푸른 물주머니를 꺼내어서 옷감에다 물을 들였던가 봐요. 북녘에서 펴낸 조선어대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거기에는 꼴뚜기라는 뜻이 있다고 밝혀 놓았어요. 그만큼은 우리 남녘보다 정성을 들여서 국어사전을 만들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신 선생님은 반물이란 말을 순우리말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닐 것 같아요. 신 선생님이 나와 같은 진주 사람인데 어찌 그럴까 싶거든요. 내 기억도 믿을 수는 없지만, 좌우간 나는 언제까지인지는 몰라도 어린 시절 고향에서 노랑 저고리, 반물치마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듯해요.

 

반물 들인 옷감은 아마 거의 치맛감으로 썼던 것인지 모르겠어요. 달리는 나도 반물이란 말을 잘 들어 보지 못한 듯하거든요. 아무튼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신 선생님이 반물을 잘못 알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주제넘은 글을 썼는데, 내 마음을 헤아려 주고 서운해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어요.

 

그리고 이건 군말입니다만, ‘이라는 한자도 잠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청색, 자색, 백색, 흑색, 황색오색이라 하고, ‘오색찬란하다는 말도 널리 쓰지요. 또 이것들은 , , , , 중앙으로 오방색이라 해서 백성들의 삶에도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만큼 이라는 글자를 오래 써서 남색, 회색, 홍색……이렇게 써도 별로 부담이 없지요.

 

그런데 나는 신 선생님이 반물색이라 쓴 것을 보고는 조금 멈칫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요. ‘이라는 말에는 본디 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반물은 곧 꼴뚜기(가 내뿜는 물의) 이라는 뜻인데, 거기다가 또 을 포개니까 멈칫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요즘에도 물을 들인다하고, ‘물감이라는 낱말도 씁니다. 봉숭아 꽃잎을 찍어서 손톱에 빨강 물을 들이고, 미술 시간에 물감 준비를 못 하면 낭패를 보지요. 이런 말에서 보면 이 곧 입니다. 그러니까 반물’, ‘노랑물’, ‘빨강물…… 이러면 그것이 바로 그런 색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내친 김에, 앞에서 빛깔이란 말도 썼으니 도 그냥 지나칠 수 없네요. ‘풀빛’, ‘잿빛’, ‘보라빛’, ‘살구빛…… 이렇게 을 쓰잖아요? 그러면 반물’, ‘감물’, ‘검정물’, ‘파랑물…… 이렇게 쓰는 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 무엇이 이며 무엇이 인가를 살피면, 우리 겨레가 빛깔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인 것인지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저 빛깔만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진 자연과 세계를 어떻게 보고 느끼고 알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말 속에 담겨 있는 정신의 움직임을 밝혀내는 일에서 이른바 철학이 비롯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태 우리말을 이렇게 살펴보지 못했으니 아직 우리에게는 철학이 없는 셈이지요. 그러니 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따져보는 것도 우리 철학을 일으키는 첫걸음으로 값진 일이 되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숙제 삼아 슬그머니 밀어 두기로 합시다. 함께 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 글이 잡지에 실려 나간 다음에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을 펴냈는데, 거기에는 반물이 올림말로 실렸다. 그러나 뜻풀이는 또한 웃지 않을 수 없게 해 놓았다. “반물색. 반물빛이렇게만 풀이해 놓은 것이다. 명색이 국어사전이라면서 이런 풀이를 해 놓았으니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