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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동래부사 송상현 곁엔 아내 아닌 다른 여인들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9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송상현’ 하면, 대개 임진왜란 때 절대적인 열세 속에도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떠올릴 것입니다. 청주 흥덕구 수의동 묵방산 자락에 가면 충렬공 송상현의 무덤이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송상현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으나, 선조가 순절한 송상현의 공을 높이 사 두사충에게 명하여 명당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인데, 풍수지리를 잘 봐, 선조가 두사충에게 묘자리를 잡아달라고 명한 것이지요.

 

그런데 송상현의 무덤 옆에는 평소 송상현에게 시종 들던 여인들의 무덤은 있지만, 정작 그의 아내의 무덤은 옆에 없습니다. 부인의 무덤은 그곳에서 1km 정도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있습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그것도 충신의 무덤 옆에 어떻게 아내의 무덤 대신에 다른 여자들의 무덤이 있는 것일까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청주지법 재판이 있을 때 짬을 내어 충렬공의 묘소를 들러보았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먼저 강상촌(綱常村)이라는 마을 표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임금이 일부러 묘토를 하사하니, 충렬공의 후손들이 충렬공의 사당과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 강상촌입니다. 강상촌은 유교의 삼강오상(三綱五常)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말하고, 오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말합니다. 삼강오륜과 같은 말이지요. 그러니까 충신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라 강상촌이라고 한 것이군요.

 

 

먼저 충렬사에 들러 충렬공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충렬사 마당에는 ‘군신의중 부자은경(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송상현이 왜적과 싸우기 전, 이 전투에서 자신이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쓴 절명시(絶命詩)의 한 구절이지요.

 

송상현은 이 절명시를 쓸 때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다음, 고향 아버님께 보내는 유서로 가지고 있던 부채에 절명시를 썼다고 합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부모에 대한 불효이지만, 그 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더 중하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겠지요. 그래서 전투가 끝난 후 적장도 이러한 충렬공의 충절을 높이 사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충렬공의 묘소로 오릅니다. 긴 계단을 오르니 3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운데 무덤이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좌우의 무덤이 가운데 있는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가가니 짐작대로 가운데 무덤은 충렬공 송상현의 무덤이고, 왼쪽은 이소사 양녀의 무덤, 오른쪽은 한소사 금섬의 무덤입니다.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인데, 양녀와 금섬도 ‘소사’라고 불렀군요.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좀 이상합니다. 양녀(良女)는 좋은 여자, 금섬(金蟾)은 금두꺼비란 뜻이니까, 아무래도 본명은 아니고 그냥 별명으로 부르던 이름 같습니다. 그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에서 한금섬은 송상현을 따라 순절하였고, 이양녀는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전쟁통에 여자가 포로로 끌려간다는 것, 그건 정조를 지키기 어렵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양녀는 포로로 끌려가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정조를 지켰답니다. 그리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자신의 누이집에 살게 하였다고 하고요. 그러다가 조선의 포로들 가운데 일부가 생환될 때, 이양녀도 생환되어 3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글쎄요... 도요토미가 아녀자 포로에게도 신경 썼다는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하여튼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답니다. 돌아온 이양녀는 곧바로 충렬공의 묘소로 달려왔을 것이고, 줄곧 충렬공의 묘소를 지켰답니다.

 

그러니 이양녀의 무덤이 여기에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이양녀의 무덤은 실제 시신이 없는 빈뫼(허묘)랍니다. 원래 선조가 동래에 묻혀있던 송상현의 시신을 이곳으로 이장할 때 그 때 이미 순절하였던 한금섬도 같이 이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임금이 특별히 묘토를 하사하여 무덤을 쓰고 나면 그 후 추가로 다른 사람 시신을 이곳에 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곳을 지키다가 죽은 이양녀도 이곳에 묻지 못하고 처음에는 금섬의 묘비에 이름만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이름만 넣어주기가 뭐했던가, 아니면 한쪽에 금섬의 무덤만 있는 것이 허전하여서인가, 아무튼 이양녀의 빈뫼를 만들어 좌우 균형을 맞춘 것입니다.

 

그럼 송상현의 아내가 이곳에 묻히지 못한 이유를 대충 짐작하시겠지요? 송상현의 아내는 송상현이 죽고도 26년을 더 살면서 때에 따라 남편의 무덤을 찾아 제례도 올리다가 늙어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임금이 내린 묘토에 같이 묻힐 수가 없어 이곳에서 1km 떨어진 곳에 홀로 묻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송상현의 부인을 만나러 갑니다. 안내판이 부실하여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찾았습니다. 과연 부인은 넓은 묘토에 홀로 쓸쓸이 묻혀있군요. 예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는 그렇다 치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홀로 있는 부인을 남편 곁으로 모실 수는 없을까요? 모실 수 없다면 양녀처럼 빈뫼라도? 그렇게 하면 이미 자리가 잘 잡혀있는 질서를 깨뜨리지 말라고 금섬과 양녀가 뭐라고 하려나?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홀로 누워있는 부인에게 위로의 잔이라도 올리고 싶으나, 둔한 저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다만 부인에게 고개 숙여 위로의 마음만 전합니다. 뒤로 돌아 묘역을 빠져나오다가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부인을 바라봅니다. “부인! 몸은 비록 이곳에 떨어져 있으나, 저 세상에서는 세 여인이 의좋게 손을 잡고 충렬공과 오순도순 잘 있으시겠지요? 부인의 온화한 인품이라면 능히 그러실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의 얘기 듣고 찾아온 후손 이제 돌아갑니다. 편히 잠드소서!”

 

가운데는 충렬공 송상현의 무덤, 왼쪽은 이소사 양녀의 무덤, 오른쪽은 한소사 금섬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