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새벽 서쪽 하늘에 유난히도 밝은 별이 있다. 샛별이라고 했다. 고도 3,600m 산 능선에 자리 잡은 사원에 발을 들어 놓자 붉은 가사를 입고 내게로 다가와 생글생글 맞이하는 어린 동자승의 반짝이는 눈빛이 그러했다. 샛별 같았다.
천진무구한 얼굴, 반짝이는 눈 속에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 버릴 듯한 유혹을 느끼며 나를 반기는 고사리 같은 어린 동자승의 손을 잡았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직은 엄마 품에서 응석을 부릴 나이인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깊은 산골에 들어와 불상 앞에 앉아 염불한다는 것인가? 가슴이 아리고 두 눈이 뜨거워졌다.

필자는 올 3월, 한 달가량 단독으로 히말라야 중턱에 있는 부탄에 가서 문화 취재를 하고 돌아왔다. 그 기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린 동자승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부탄 취재차 돌아본 사원마다 많은 아이들이 붉은 가사를 입고 수행하는 모습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들이 울창한 숲속, 그리고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해발 3,600고지 기암절벽에 있는 ‘추푸네 도지파모’ 사원에서 어른 스님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들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 한참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 새벽 서산에 걸린 샛별과도 같은 눈, 천진한 눈망울들이 내 가슴속에 아예 집을 짓고 사는 듯싶다.
도지파모라는 곳은 웬만한 장정들도 찾아가기 힘든 고산지대에 있는 사원이다. 나는 한 때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인 설악산 8부 능선에 있는 봉정암을 수년간 다닌 경험이 있다. 그런데 봉정암과 감히 견줄 수 없는 험준하고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도지파모는 부탄 고전 건축 양식으로 바위산 위에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곳을 가기 위하여 산을 오르는 동안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고산증에 숨쉬기가 곤란하여 몇 번이나 걷다 쉬기를 반복하며 어렵게 도지파모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렇게 높은 산인데도 기온이 낮거나 바람이 거칠게 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거친 숨을 가다듬고 사원에 들어서니 몇몇 라마승이 나를 반겨주었다. 라마승을 따라 법당에 들어서니 놀랍게도 그 안에는 5~8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동자승들이 불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다라니경(陀羅尼經 : 산스크리트 문장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적은 비밀스러운 주문)를 외우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필자가 들어서니 반짝이는 눈들이 낯선 이방인을 향해 일시에 몰렸다.
아이들을 대하는 순간, 반가운 생각보다 “이렇게 높고도 험준한 산속에 어찌하여 어린아이들이 와 있게 된 것일까?”라는 의문이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아직 어머니 품에서 재롱이나 부려야 할 아이들이 “세상 물정을 얼마나 안다고, 불교의 심오한 뜻을 얼마나 이해한다고, 이렇게 둘러앉아 다라니경을 읽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 애들이 평화롭게 보이기는커녕 사뭇 짠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을 응시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은 나를 한순간에 매혹하고 말았다.
사실 우리 주변 어느 곳을 가나 어린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깊은 산골 그것도 부모가 없는 외진 사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눈빛과는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다. 어느 때 산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슴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눈망울과 너무도 흡사한 천진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오랜 시간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사로잡고 있다. 이 순간도 그 눈빛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탄에서 만난 아이들의 천진한 눈빛은, 60년 전 내가 어렸을 적, 내 또래 동무들의 눈빛이 그러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천진한 동무들의 모습에서 오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눈빛이 부탄 사원에서 만난 동자승들의 천진한 눈빛과의 만남인 것 같다. 그래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주위에는 천진 동자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부탄에서 만난 동자승들의 눈빛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천진한 눈빛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진이란 의미는 환경과 생활상 관계성을 떠나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천진난만의 의미는 보통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해맑은 모습을 두고 표현하지만,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면, 천진(天眞)이란 “하늘처럼 꾸밈이 없이 순수한 상태”를 말하며, 난만(爛漫)이란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퍼져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두 낱말을 합쳐 "아무런 꾸밈이나 사악한 마음이 없이 순진하고 밝다."라고 풀이를 한다.
우리나라는 참 잘 사는 나라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두 살만 넘어도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폰에서 생성되는 고차원적 문물을 빠르게 만나게 되고, 성장해서도 품에는 항상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또한 첨단과학 시스템 속에서 부족함 없이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그뿐인가. 요즘 트로트 열풍이 일면서 어린이들이 기성세대들이 누리는 무대에 올라가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아예 동심의 세계를 건너뛰고 있다. 어린이들을 어른 모습으로 분장시켜 어린이 동심의 세계가 파괴되고 있다.
어른들은 여기에 관심이 쏠리다 보니 너도나도 어린이들에게 돈을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천진성은 간 곳 없고 앵벌이가 되고 있다. 어른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욕구를 충족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따라 하는 행동들이 처음에는 귀엽고, 신기고, 좋아들 할지 모르지만, 끝내는 어른들의 흉내 속에 빠져들어 너무나 소중한 천진과 동심을 넘어 이상의 세계로 건너뛰게 된다는 사실은 것은 사필귀정이다.
순수와 천진과 난만의 세계를 모르고 아바타와 같은 조형물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이를 보고 누구 하나 걱정을 하거나 위험하다고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얼마 전 JTBC ‘사건 반장’에서 기상천외한 사건이 방영되었다. 충청도 모 초등학교 몇몇 불량 어린이들이 ‘개혁 혁신당’이란 모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건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선생님들을 수업 시간에 갑질하고 끝내는 학교에서 내쫓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모여서 전략을 짜고 조직적으로 움직여가며 선생님을 괴롭히고, 격분을 유발해 이를 아동학대라고 몰아세워 부모에게 고자질하고 경찰에 고소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성 정치인들의 퇴폐적인 당파싸움을 그대로 모방한 행동들이다. 이러한 어린이들을 두고 순수하고 티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진난만하다고 그 누가 손을 들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 사회는 변질된 환경과 무분별한 문명의 조합 속에서 거듭거듭 발전만 지향하고 있다. 시대적 착오와 교육의 모순으로 천진난만해야 할 어린이들이 갈 곳을 잃고 있는데도 모두 모르쇠하고 있다. 미래의 꿈나무들이 어른들의 욕구 탓에 기형화해 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멍하니 관망만 하고 있다. 이래서야 하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 어린이의 참교육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제는 더 이상 천진난만해야 할 어린이들을 혹독한 우열의 경쟁 속에 내몰지 말고, 인간의 본성인 순수와 인성과 지성과 품성을 금옥같이 지닐 수 있도록 조기 교육부터 새롭게 다져나가야 할 것 같다.
부탄 어린이들의 눈망울이 아직도 샛별처럼 빛나고 있는 것은, 2천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외세에 흔들림 없이 나라의 정신문화와 전통을 꾸준히 지켜온 자랑스러운 국민정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문화는 뒤떨어졌을지라도 국민이 모두 소박함과 검소함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스럽기만 했다.
부탄 사원에서 만나 천진 동자들에게 다가가 “나는 한국에서 온 일취 스님입니다. I am Buddhist monk Il chwi from Korea”라고 했더니 그 순간 뭔가 마음이 통했던지, 엄미 닭을 졸졸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처럼 나를 줄곧 따라다니면서 “일취 멍크” “일취 멍크” 하며 외쳐댔다.
지금도 가끔 내 꿈속에 부탄 아린 동자들이 나타나 샛별 같은 눈을 깜빡이며 “일취 멍크” “일취 멍크” 나를 부르며 따라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