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꽃씨를 주는 로전사

꽃씨앗! 참된 삶의 가치여!
[석화 시인의 수필산책 9]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야, 요것들을 보지, 여보세요, 어서 나와보세요. 네?!”

점심식사 휴식 짬에 소파에 걸터 누웠던 나는 앞뜨락에서 떠들어대는 안해의 목소리에 끌려 뜨락에 나섰다.

 

안해는 손바닥만큼 하게 뚜져놓은*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길 좀 보시라는 데두요.”

안해는 응석을 부리듯 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가뭇가뭇한 토양을 뚫고 파란 바늘 끝 같은 것들이 뾰족뾰족 올려 밀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벌써 햇빛을 받아안으려는 듯 여린 두 팔을 펼치고 미풍에 제법 하느작이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어떤 새 생명의 탄생을 맞는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요것들이 모두 꽃으로 활짝 필 때면 우리 집 뜨락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한해는 나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나의 눈앞에는 꽃 씨앗을 가져왔던 낯모를 로인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그날, 새살림을 갓 꾸린 우리는 날듯한 기분으로 ‘마당을 공근다’*, ‘창문 유리를 닦는다’ 하며 뻔질나게 돌아쳤다.

 

“허 허, 새집들이에 기쁘겠군.”

일손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보니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새하얗게 센 낯선 로인 한 분이 돛천멜가방*을 멘 채 나지막한 울타리문을 잡고 서 있는 것이었다.

“네, 저…”

“나 말인가?”

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탈하게 웃고 나서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자네가 방송소에 새로 온 기자동무지!”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어안이 벙벙해났으나* 안해는 얼른 나가 그의 멜가방을 받아들고 로인을 모셔들이는 것이었다. 서로 낯익은 것만 같았다.

로인은 돛천가방을 헤쳤다. 그 속에는 오롱조롱 약병사리*가 20여 개 들어있었다.

로인은 우리 둘을 일별하고* 나서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별 게 아닐세, 꽃씨라네.”

“네?”

나는 이 로인이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싱거운 것 같기도 하여 더군다나 어정쩡해났다.* 그런데 안해는 제꺽 “고마와요” 하며 허리를 갑신하는* 것이었다.

로인은 신혼살림도 꽃처럼 곱게 키우고 꽃피우라며 갖가지 꽃씨를 뒤숟가락씩* 종이에 싸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오실 때처럼 어깨를 으쓱하고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웃음소리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 로인님은 정년퇴직한 로전사*래요. 집 뜨락에 온실을 짓고 갖가지 꽃을 키워 씨앗들을 받아서는 기관, 학교, 병원 어데나 다 보내준대요. 우리 같은 햇살림* 집들도 수태 찾아갔대요.”

움트는 파란 싹을 살펴보며 안해의 이야기를 듣던 나의 머릿속에는 숭엄한* 화폭들이 안겨 왔다.

 

불을 토하는 기관총을 틀어잡고 원수들을 쓸어 눕히는 용사…

금빛 훈장을 빛내며 고향길로 걸어오는 귀환병…

푸른 논벌*에서 흐뭇이 땀을 씻는 로간부*…

나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화폭은 하나의 시상으로 무르익어 더욱 완연해졌다.

 

“그렇지! 됐다. 됐구말구!”

나는 무릎을 탁치며 일어섰다. 벌써부터 써보려 하던 참된 인생의 총화*에 대한 서정이 령감을 타고 날아들었다.

 

“꽃씨앗! 참된 삶의 가치여!”

그렇다. 청춘으로 피어날 땐 아름답게 활짝 피고 늙어서도 아름다움을 온 천하에 뿌리고 이 세상에 향긋한 향기가 차넘치게* 하려는 로일대*들의 고귀한 품성, 그것이 바로 로인이 가져다준 알알의 꽃씨앗과 흡사하지 않은가! 앞 뜨락 화단에서만이 아니라 내 마음의 꽃밭에서도 파란 싹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있지 않은가! 하늘을 안고 태양을 안고…

 

 

<낱말풀이>

* 뚜져놓은 : 뚜지어 놓다 = 꼬챙이나 뾰족한 것으로 쑤셔서 파놓다.

* 공근다 : ‘공그르다’의 사투리. 바닥을 높낮이가 없도록 평평하게 만들다.

* 돛천멜가방* : 돛천(돛을 만드는데 쓰는 질긴 천)으로 만든 가방

* 어안이 벙벙해났으나 : 뜻밖에 놀랍거나 기막힌 일이 생기어 어리둥절했으나

* 약병사리 : 약을 담는 작은 병

* 일별하고 : 한 번 흘낏 보고

* 어정쩡해났다 : 어리둥절했다

* 갑신하는 : 고개나 몸을 가볍게 숙이는

* 뒤숟가락씩 : 두어 숟가락씩

* 논벌 : 주로 논으로 이루어진 넓고 평평한 땅

* 로간부 : 늙은 간부, 자격이 높은 어른

* 로전사(老戰士) : 늙은 병사, 인생의 선배

* 햇살림 : 신혼살림

* 숭엄한 : 숭고하고 엄숙한

* 총화 : 사업이나 생활의 진행과정과 그 경과를 분석하고 다짐하며 앞으로의 사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 경험과 교훈을 찾는 것

* 차넘치게 : 차고 넘치게

* 로일대 : 늙은 세대, 원로, 어르신

* 일별하다 : 다.

* 갑신하다 : 고개나 몸을 가볍게 숙이다.

* 논벌 : 주로 논으로 이루어진 넓고 평평한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