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1945년생인 조영남은 음악대학을 다녔고 가수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때에는 그림을 잘 그려 미술반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23살 때인 1968년에 번안곡인 딜라일라를 불러서 단번에 유명 가수 대열에 끼게 되었다. 그는 음악과 미술을 동시에 잘하는 대표적인 재주꾼이다. 조영남은 스스로 자신을 화수(화가+가수)라고 말한다. 그는 미술과 음악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매우 명쾌하게 설명한다.
“미술과 음악에 차이가 있다면 눈과 귀의 차이이다. 미술이 눈을 위한 기쁨조라면, 음악은 귀를 위한 기쁨조 같은 것이다. 나는 음악을 먼저 공부했기 때문에, 미술에 관한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음악과 미술 두 가지를 다 해보면, 그 두 가지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둘 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옛날 초가집이 있는 풍경화를 그릴 때의 감정이나, 윤용하의 '보리밭'을 내 목소리로 부를 때의 감정은 결국 동일하다. 초가집을 그릴 때도 기분이 아련하고 몽롱해져서 어린 시절 추억에 젖게 되고 보리밭을 노래할 때도 역시 기분이 아련하고 몽롱해져서 추억에 젖어 들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쾌적해진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나 그림을 그릴 때 이러한 감정에 젖게 되면 신기하게도 나의 노래를 듣거나 나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미술은 완전 자유다. 맘대로 공상할 수가 있다. 나는 내가 오히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서 아무거나 막 그려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나왔으면 결코 화투짝 같은 걸 그릴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교육 없이도 미술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된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나 우리 동네 이발소 아저씨도 아무 때나 얼마든지 화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만일 당신이 누구한테 ‘나는 가수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면 질문이 꼭 들어오게 되어 있다. 히트곡이 뭐냐, 언제 열린 음악회에 나왔냐, 트로트냐 발라드냐, CD를 몇 장 냈느냐, 등등. 가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대답을 못 하면 결국 당신은 가수가 아닌 게 들통나고 망신만 당하게 된다.
미술은 다르다. 당신이 자칭 화가라고 했을 경우에도 그토록 까다로운 질문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그림을 그리냐’라는 질문이 나왔을 경우 동양화, 서양화 중에 아무거나 둘러대면 되고, 수채화를 그린다고 해도 되고,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린다고 해도 된다. ‘어디서 전시 했냐’라고 물으면 그때는 ‘지금 전시 준비 중’이라고 대답하면 된다. 실제로 장안에는 그냥 전시 준비만 십수 년째 하는 화가가 수백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서 한국 미술계에 차질이 생기는 건 절대 아니다. 하늘에 걸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무나 화가가 될 수 있다. 단 유명한 화가가 되는 건 보장 못 한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조영남이 2007년에 쓴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은 미술에 대한 입문서로서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 매우 알기 쉽게 현대미술을 설명한다. K 교수는 그 책을 사서 읽어보았는데, 조영남은 미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미술이란 우리의 두 눈을 즐겁게 하거나 언짢게 하는 모든 것,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K 교수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미술의 정의는 너무나도 넓은 정의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미술이라면 미술의 특징에 대해서 별로 말해 주는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모든’이라는 형용사는 함부로 가져다 붙일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미술이라면 이 세상에 미술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별로 쓸모가 없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눈을 언짢게 하는 것도 미술이라면, 이 또한 세상 사람의 통념을 벗어난다.
ㅅ 여교수도 조영남처럼 음악과 미술 두 가지를 잘하는 드문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는데, 졸업한 뒤에 유명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는 1979년 어느 날 갑자기 가요계를 은퇴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언젠가 K 교수가 그녀에게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노래는 잠시 외도였다. 진정한 꿈은 그림 공부였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날 K 교수가 다시 물어보니 다른 이유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열창곡이었던 ‘개여울’이 억압적인 유신 정권에 의해 뚜렷한 이유 없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자 그녀는 한국사회에 대해 크게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10년 동안 그림 공부를 하였다. 우리나라 민화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녀는 1993년에 귀국한 뒤 S대 서양화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그녀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그 사이에 세월이 많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 까닭이다.
세 사람은 미녀 없는 미녀식당에서 미술과 음악을 주제로 모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아 교수가 식비를 계산하였다. 식당 문을 나와서 차로 가는데, 마침 미스 K가 들어오다가 일행과 마주쳤다.
“아니, 교수님, 왜 벌써 가세요?”
“앙꼬 없는 찐빵만 먹다가 이제 가려고요.”
“아이, 미안해요. 서울에서 일 좀 보느라고 늦었습니다.”
“K 사장님, 이분 아시죠? 우리 학교를 빛내 주는 간판스타 ㅅ 교수님입니다.”
“그럼은요. 잘 알지요. ㅅ 교수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10년 전에 ㅅ 교수님의 청담동 화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다음에 꼭 한번 오세요.”
“네, 그러죠.”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