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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화보] 고려 국찰(國刹) 현화사 석등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현화사(玄化寺)는 고려 현종 9년(1018)에 창건된 고려의 왕실사찰이다. 현종은 현화사를 창건하고, 둔전(屯田) 1,240결을 내려주어 절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당시 고려내 고승이었던  삼각산 삼천사의 주지 법경(法竸)스님을 모셔 현종의 왕사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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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1021년 현화사에 다시 거동하여 현화사를 세운 내력을 담아 창건비를 세웠다.  이후 덕종1년(1032)에는 현화사에 휘신도량(道場 선왕 또는 선왕비의 기일(忌日)에 행하던 불교 행사)을 개설하였고, 문종 1년(1047)에도 휘신도량을 개설하였으며, 문종 6년(1052)에는 임금이 직접 스님들을 공경하는 의미의 반승(飯僧)행사도 베풀었다. 이는 현화사가 고려왕실의 으뜸 절이었음을 반증한다.

 

이후로도 문종 21년(1067)에는 현화사에 주석하던 고승 해린(海麟)국사가 노환을 이유로 개경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자, 문종이 직접 현화사에 들러 탕약과 금은기(金銀器-금과 은으로 만든 귀한 그릇)를 해린국사에게 전하였으며, 문종 24년(1070)에는 왕자 탱(竀)을 이 절로 보내어 출가 승려로 만들었다.

 

그 왕자가 바로 훗날 초조대장경을 편찬했던 대각국사 의천스님이다. 이후로도 고려시대 많은 임금이 현화사와 깊은 관계를 맺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현화사는 고려왕실사찰로 가장 중요한 큰절이었다. 현화사에서 행한 왕실행사를 간추려 보면 현종1년(1095)에는 태후가 선종의 소상재(죽은지 1년만에 지내는 제사)를 베풀었고, 숙종7년(1102)에는 은자유가현양론()의 경찬법회에 참석차 현화사에 들렀다. 또 의종(毅宗)은 현화사에 자주 들러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반차대회를 자주 열었으며, 부차대회 나한재 등을 베풀기도 하였다. 또, 현화사 장흥원에서는 과거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당대 최고의 고승들이 왕사로 주석하면서 왕실의 큰행사를 도맡아 행하였던 현화사였으나, 곡절의 역사를 거치면서 언제 어떤 인지 폐사되고 말았다. 이제 그 화려했던 현화사터에는 고려시대 세워진 칠층석탑과 주초석, 당간지주, 석교(돌다리)와 석불의 일부 등이 남아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이 석등은 폐허속에 서있다가 일제강점기 서울로 옮겨온 후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 해방을 맞이하여 그대로 남게되었고, 조선조 궁궐의 복원과 국립박물관의 이전 등으로 몇 차례 더 옮겨지다 지금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정면의 한 모퉁이에 이처럼 서 있다.

 

현화사석등은 높이 5.0m이상으로 한국의 수백기 석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석등이다. 이 석등의 구성은 하부는 기단에 해당하는 간주석이 고복형(북모양의 돌장식)으로 원기둥처럼 서있고, 그 위에는 화사석( 火舍石)이 4각형의 평면 위에 기와지붕을 가진 건물의 형태로 있고,  그 위에는 석탑의 상륜부처럼 화려한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이 석등의 규모는 매우 크지만 그 미적 비례감은 고려시대 세웠던 다른 훌륭한 석등인 실상사 석등이나 화엄사 석등에 견주어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기단부부터 간주석, 화사석 그리고 상륜부까지 매우 세밀한 조각장식으로 왕실의 큰 관심만큼이나 정성을 들였으며, 석등의 앞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배례석도 갖추고 있어 고려시대 석등으로 매우 귀한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리 자주 옮겨다니면서도 훼손된 흔적이 없이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매우 귀한 고려시대 보물급 석등이다.

 

이처럼 귀한 현화사 석등이지만, 지금은 거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모퉁이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요기거리로 전락한 모습으로 있으며, 또한 그 귀한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어쪄면 그 원인이 제자리를 떠나온 유물로서 언젠가 개성 현화사터로 돌아가야할 운명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국내 많은 석등들 가운데 이보다 못한 석등들도 보물이 허다한 상황에서 역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떠돌다 박물관의 모퉁이를 지키는 귀한 현화사 석등이 문화재적 가치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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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