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반감기(half life, 半減期)”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핵물리학에서 어떤 특정 방사성 핵종(核種)의 원자수가 방사성 붕괴에 의해서 원래의 수의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요즘은 기타 자연과학과 사회학분야에서도 널리 쓰인다.
정보과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반감기”는 10년 정도였다. 더 하위 분야로 내려가면 플라스마물리학은 5.4년, 원자핵물리학은 5.1년이 반감기였다. 생물학에서도 가령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체세포에 들어 있는 염색체의 수가 48개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수가 46개라고 배운다.
오늘 발표된 새로운 론문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는 인용되지 않아 낡은 론문으로 폐기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지식에도 적용된다. 모든 지식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또 붕괴하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지식으로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면 더는 지식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려면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따라서 “살아서 늙을 때까지 배워라(活到老, 學到老)”라는 말이 정답이다. 중국의 사자성구로 “괄목상대(刮目相對)”가 있다. “삼국지ㆍ오지(三國志ㆍ吳志)” 편에 적힌 글에서 유래한 구절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왕 손권의 휘하 장수 중에 려몽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었으나 공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어느 날 려몽은 오왕 손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고 싸움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후 재상 로숙이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려몽을 만났다. 그런데 로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려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것에 놀랐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나? 자네는 그젯날의 려몽이 아닐세 그려." 그러자 려몽은 "무릇 선비란 헤어져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나면 눈을 비비고 대면(刮目相對)하여야 한다네."라고 대꾸했다.
사흘이 지나면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찾아보면 우리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배우고 익힘”을 뜻하는 “공부”라는 말에 해당하는 어휘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서 모두 하나와 같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 대가를 바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말의 “공부”를 한자는 “工夫”로 쓴다. 그런데 중국어에서의 “工夫”는 “나 지금 겨를이 없어(我现在没工夫)”처럼 시간과 정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부”의 또 다른 한자 “功夫”는 실력 또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중국무술을 가리켜 “쿵후(功夫)”라고도 부른다. 우리말 “공부”는 중국어로 “학습(學習)”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우리말 “공부”에 대응하는 일본어는 “면강(勉强)”이다. 이 어휘는 한자 “힘쓸 면(勉)”자와 “강할 강(强)”자가 어울린 단어로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면 “억지로 시키다.”가 된다.
공부하다는 뜻의 영어단어 “스터디(study)”는 라틴어 “studio”에서 나온 어휘로 “자기 자신을 (~에) 헌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왔다. 이 단어는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넘어오면서 “공부하는 사람, 학생”이라는 뜻의 “스튜던트(student)”가 되고 “(어떤 것에 대해) 헌신하는 작은 방(studiolo)”이라는 말로 화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헌신하는 작업실을 지칭하는 “스튜디오(studio)”가 되었고 지금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뿐만 아니라 방송실, 록음실, 촬영세트장 등 넓은 의미로 쓰인다.
공자는 일찍 “론어ㆍ학이(论语ㆍ学而)”편에서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 력설하였고 안중근의사도 옥중에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 口中生荊棘)”라는 글귀를 남겼다.
어제를 보내고 오늘에 이어 래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늘 지식의 반감기, 독서의 반감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읽고 새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대여, 공부가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