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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독립운동가며 교육운동가였던 이승훈 선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30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강산, 조상들이 지켜 온 강토를 원수 일본인들에게 내맡길 수가 있겠는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평안도 정주에서 오산 학교가 문을 열던 날, 이승훈 선생이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 학교가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라며 연설을 마쳤다고 하지요. 오늘은 독립운동가며, 교육사업에 몸 바친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 선생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선생은 또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선생은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제가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600여 명의 민족운동가를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구속되었는데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한다.”라고 답변한 탓에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