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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황금보기를 돌처럼 하라던 최영장군 무덤을 찾아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역사를 돌아보면 태평성대라기 보다는 하루 하루 한해 한해가 모두가 격동의 시절이었다. 멀리 보면 단군의 고조선 이래 5,000년의 역사라고 하지만, 고조선시대의 역사는 대부분 만주지역에 있었다. 이후 5국시대(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 가야)는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서로 경쟁하며 이어오다가 한반도로 완전히 고착화 된 시점은, 불행하게도 신라가 통일하면서 부터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하였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만주지역에 대진(발해)을 건국하여 230여년을 지속하다가, 한반도 지역에서는 후삼국을 거치며 대진국의 유민들도 고려에 부분적으로 흡수되기 까지 하였으니 한민족이 만주지역을 완전히 잃은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고 할 수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세운 왕조이나 실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별로하지 못하였다. 고려 중기 한때 서경(평양)으로 천도한 뒤 만주를 되찾겠다는 정지상과 묘청의 북진주장파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개경파에 숙청되었다.

 

이후로 고려는 내부 문신과 무신의 정권다툼을 하다가 결국 몽골족 원나라에 패하여 오랫동안 간섭을 받다가 왕조의 생명을 마쳤는데, 그나마 마지막 시기인 공민왕 때에는 잃어버린 만주를 되찾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기도 하였다.

 

그 출병의 주역이었던 장군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최영(崔瑩)장군이다. 최영은 고려 후기 원나라의 간섭기에 귀족 문민집안의 아들로 1316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최원직으로 사헌부의 간관이었는데, 최영은 문민집안의 아들이었으나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출중하여 글읽기 보다는 병서와 무술을 좋아하여 무장의 길에 들게 되었다.

 

최영은 무인으로 관직에 오른 뒤 수많은 공적을 세웠는데, 남북을 오르내리며 적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남쪽으로는 왜구들의 잦은 출몰을 진압하였고, 북으로는 원나라 말기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으며 국내에서는 공민왕을 보호하며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고려후기 최고의 명장으로 우뚝선 최영은 공민왕이 죽은 뒤 풍전등화 같은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우왕의 보호자가 되어, 1388년 70살의 나이에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는 중국이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혼란시기로 고려도 그 여파속에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의 새로운 패자가 된 주원장(명나라 태조)은 원나라의 땅을 모두 명나라 땅으로 삼았으며 고려에게도 옛 원나라가 통치하던 곳을 모두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내놓으라는 땅은 철령이북의 땅으로 이곳에는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가 있었으니 고려의 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영은 그동안 원나라에 강제로 빼앗겼던 철령 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쌍성총관부를 해체해 버리고 고려 땅으로 편입하였다. 한편 이때는 명나라 초기로 내정이 불안한 시절이라 최영장군은 이 기회에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의 옛땅인 만주의 중심지역인 요동을 점령하여 고려땅으로 회복하자고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당시 최영과 쌍벽을 이루던 이성계의 반대로 번번이 벽에 막혔다가 우왕이 최영의 손을 들어주어 요동정벌군을 편성하고 출병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왕은 자신의 신변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협에 최영장군을 자신의 곁에 두고 이성계와 주민 수만을 파견하였다.  최영장군은 출병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부탁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편 억지로 출병한 이성계는 위화도에 도착한 뒤 장마철을 맞이하여 도저히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뒤 군사를 돌려, 고려 정부를 공격하는 반역을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최영은 자신의 군사를 모두 이성계에 내어준 상황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없었다. 이어서 이성계는 우왕 또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정한 뒤, 공민왕의 아들인 창왕도 폐해버리고, 왕씨중 자신의 뜻에 거역하지 못할 사람을 택하여 공양왕으로 세웠다가 후에 그로부터 양위 받는 형식으로 조선왕조를 세웠다. 한편 최영은 결국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뒤,  압송되어  죽게 되었다. 그의 나이 70살인 1388년 이었다.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이후 4년 뒤인 1392년 조선을 개국하면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최영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평생 자신이 존경하던 선배이자 뒤에는 자신의 라이벌이었지만, 고려 온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최영장군을 따르는 민심만은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영장군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은 청렴결백한 충신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결국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장군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충심만은 그를 죽인 이성계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무덤은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 바로 밑에 작은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그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말은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 부터 좌우명으로 받은 것이었고, 그 좌우명대로 살아갔다. 그는 자신이 처형되기 전에 남긴 예언 또한 후세에 길이전해지고 있다.

 

"내가 평생에 탐하는 삶을 살았다면 무덤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고, 왕조와 백성을 위해 결백하게 살았다면 내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최후를 떳떳하게 맞이 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  민둥묘였던 최영장군의 무덤은 1976년부터 풀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고양시에서 잔디를 잘 가꿔 관리 중이다.

 

바르게 살고, 정의를 위해서 살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의 유적과 권모술수로 정권을 찬탈한 뒤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들을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후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이제 21대 총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뽑을 국회의원들이 우리나라의 앞날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지금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권모술수로 국회의원이 된 뒤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전혀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국민이 눈 부릅뜨고 투표를 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가르친 최영장군의 뜻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 19가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어수선한 시절, 목숨보다 정의를 위해 살다간 최영장군의 무덤을 돌아보며 뼈저리게 느낀다.

 

최영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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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