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환 한글철학연구소장] 한겨레신문 지난 6월 22일 치에는 한겨레말글연구소 김진해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의 “한글의 역설”이란 글이 실렸다.
우리말에 영어가 많이 섞여 있게 된 것이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고 한글 탓이라는 주장이다. 한글은 소리만 본뜰 뿐 뜻을 담지 않아 몸놀림이 가벼워 들리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적는데 한자는 뜻이 소리와 함께 있어서 매번 소리로 적을지, 뜻으로 적을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으로 진단하였다. ‘电视’(텔레비전=전기+보다), ‘电脑(’(컴퓨터=전기+뇌), ‘电影’(영화=전기+그림자), ‘手机(’(핸드폰=손+기계)을 보기로 들었다. 한글만으로는 문제가 많고 한자를 써야 영어를 막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조선의 선비들은 빼어난 글자인 한글을 ‘언문’, ‘암클’이라 얕보고 중국 글자를 떠받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세기부터 한글이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였을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한글은 소설이나 편지 같은 사적 영역의 문서에서나 쓰였다. 한문을 잘하면 과거를 통하여 출셋길이 훤하게 열렸다. 학문이나 교육이 한문 경전을 읽고 풀이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과거 답안을 한문으로 제출해야만 했다. 유교 경전의 내용은 모두 중국 역사, 중국 문학, 중국 사상이었다. ‘언문‘을 버려야 중국과 같은 글자를 써 ‘오랑캐’를 벗어나 ’중화‘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구한 말 주한 영국 공사가 본국 정부에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다. 서울에 외국인이 들어온 지 불과 14년도 안 됐지만, 영어의 능숙함은…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가히 따르지 못할 정도’라고 보고했다. 흔히 말하듯 우리가 ‘어학 천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만큼 외국어가 출세와 직결되는 세상에서 긴 세월 동안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잘못해도 전혀 흉이 되지 않았다. 식민지 시절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1938년부터는 조선어가 선택 과목이 되었고 1943년부터는 그조차 폐지되었다. 당시 대학 진학을 꿈꾸던 최상위권 학생과 부모들은 이 조치를 오히려 반겼다. 그들은 일본인 학생이 배우지 않는 과목을 조선인에게만 부과하는 것을 ‘민족차별’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어는 식민지 원주민의 하급 말글이었고 진학과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되는 과목이었다.
1945년 9월 7일에 요코하마에서 발표되고 9월 11일 치 매일신보에 실린 미 군정 포고령 제1호의 제5조는 군정 기간에 “모든 목적을 위하여 영어가 공식 언어”임을 선언하고 있다. 갑자기 영어를 잘해야 출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말과 글자를 우리 스스로가 우습게 여기고 얕보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대주의 불패 신화다.
아직도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없다. 우리말은 출세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되고 영어는 문명과 학문의 상징이다. 15세기 최만리에게 한자 한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근본 문제는 새말을 애짓는 힘을 우리가 거의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소리글자냐 뜻글자냐의 차이가 문제 되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copmputer’마저 ‘ordinateur’로 옮긴다. 따라서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 낱말이 처음 나왔을 때 대중이 보인 통속적인 반응은 우리가 이런 새말 만들기에 서툴렀던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늘날 온 누리에 번져가는 한국 대중문화를 ‘한류’. ‘k-팝’, ‘k-드라마’ 등으로 부른다. ‘한류‘는 중국인이 붙인 이름이고 ’k-팝‘은 영어식 이름짓기다. ‘육이오’를 ‘한국전쟁’이라 부르듯, 바깥의 관점에서(한국 사람이 처음 지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 대중문화에 부친 이름이다.
한글을 온전히 쓰고 한자를 몰아낸 것이 아직 한 세대가 채 못 된다. 외래문화의 주체적 수용이란 늘 거창한 게 아니다. 이런 낱말 하나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인이 새말짓기에 능한 건 한자 덕분이라기보다는 오랜 중화사상에서 오는 것이다. 문화의 중심에서 바깥에서 받아들일 것이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글 탓에 영어가 많이 들어오고 한자 덕분에 (중국어에, 또는 한국어에) 영어가 덜 들어온다고? 케케묵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