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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20년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뽑아

막대한 재산을 쾌척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춧돌을 놓아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망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석영(1855~1934) 선생을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선생은 185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다가 1910년 동생 이회영(’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설립되었으며,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구국인재를 양성, 무장항일 투쟁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생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어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 개교식를 가졌다. 이곳에서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독립전쟁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1912년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선생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선생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선생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노후에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과 6형제들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