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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당굿 당주 서경욱

[양종승의 북한굿 이야기 19]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서경욱은 1957년 6월 7일 경기도 이천군 모가면에서 아버지 서기득과 어머니 안임영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셋, 언니 하나,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키 153cm, 체중 48kg 정도의 체구가 단아하고 피부는 흰 편이며 미인형으로써 눈이 크고 귀염성 있는 형이다. 그녀의 할머니가 신기(神氣)가 있었다고 하지만 신을 모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경욱은 태어나자마자 몸이 몹시 약한 탓에 부모가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는 아기가 죽은 줄 알고 이불로 싸놓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시름에 잠긴 어머니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이불을 펼쳐보니 아기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면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태어난 지 1년 뒤인 1958년 6월 30일에야 비로소 출생신고를 하였다. 7살 되던 해 우연히 지나가던 스님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절로 데려가려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몹시 아파 학교를 거의 앓으면서 다녔다. 17살 되던 해 원인 모를 병으로 3달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거동을 못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밥은 물론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해 입이 말라 혀가 꼬일 지경이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할아버지 한 분이 표주박으로 약물을 떠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약물을 받아먹을 힘조차 없었다. 할아버지는 ‘너는 아직 여기 올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표주박의 물을 세 모금 먹여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할 수 없이, 집에서는 당시 황해도 굿으로 유명한 우옥주 만신을 불러와 병굿을 하였다. 그리고 아팠던 몸이 나았다. 그때부터 서경욱은 꿈을 꾸게 되면 쪽진 할머니가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때로는 알지도 못하는 일과 특정 사람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화하여 본인은 물론이고 당사자들에게도 큰 화를 면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부모가 자녀교육을 위해 마련한 서울집으로 올라와 지냈다. 23살 되던 해, 강원도 출생의 남편과 혼인했다. 남편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남매도 두었다. 그러나 혼인 뒤에도 서경욱에게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지속해서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시흥을 가야겠다고 남편을 졸랐다. 서경욱 부부가 마을 찾아간 곳은 지난날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나 알려준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이 땅을 사야 한다며 싼값으로 살 수 있다고 남편에게 졸랐으나 남편은 쓸모없는 땅이라며 거절하고 말았다. 3년 뒤 그 땅은 금싸라기가 되어 있었다.

 

서경욱은 자신에게 신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신을 받지 않으려고 버텼다. 이해를 못 하는 남편과의 사이에는 갈등이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던 딸이 통곡하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장군님과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를 보았는데 수박을 넝쿨 째 집안으로 굴려 주었다고 했다. 서경욱은 겁이 났다. 자신이 신을 받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신이 딸에게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서경욱은 할 수 없이 36살 되던 해,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와 신의 부름에 따라 제자가 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신령님께 맡기기로 했다.

 

서경욱 나이 36살 되던 해 8월 13일 황해도 굿으로 내림굿을 받았다. 말문이 터지자 한 치도 빗나감이 없는 공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서경욱은 영험한 만신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에게 고금의 충절 최영장군께서 몸주신으로 강림하였다. 서경욱 만신은 자신에게 강림한 최영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당굿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최영장군의 높은 뜻을 본받고 행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월 1일 최영장군당굿보존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2004년에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최영장군당을 건립하여 최영장군당굿을 열어오고 있다.

 

 

서경욱은 황해도 굿으로 행해지는 최영장군당굿을 윗대의 큰 만신들로부터 배웠다. 서경욱의 신어머니 김순자(1948년생, 일명 정환 엄마, 황해도 옹진 출신)는 한국동란 때 인천으로 내려온 황해도 만신이다. 김순자의 윗대는 경찰국 만신(황해도 출신, 사망)과 남동 만신(황해도 출신, 사망)으로써 역시 한국동란 때 인천으로 내려와 활동하였다.

 

경찰국 만신은 황해도 굿의 대가였던 우옥주 만신(1920-1993, 황해도 옹진출신)에게서 굿 문서를 전수하였다. 우옥주 만신은 서경욱이 죽을 지경이었을 17살 때 병굿을 하여 살려내기도 하였다. 우옥주 윗대 계보로는 김기백 박수와 최일리 만신이 있다. 김기백 박수는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 석 자를 날린 유명만신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굿하는 도중 작두 위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공수를 내려 일본순사에게 사상범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사망하였고, 최일리 만신은 월남하여 활동하다 인천에서 사망하였다.

 

서경욱 만신의 최영장군당굿

 

최영장군당굿의 목적은 최영장군신과 여타의 신들을 강림시켜 최영장군을 추모하고 신령들을 즐겁게 대접하기 위함이다. 이때 최영장군과 여타의 신령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의례가 시종일관 흥겹고 즐겁게 만든다. 이러한 형식과 목적을 갖추고 있는 굿은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기본적 틀을 갖추어 이루어지는 이른바 강림신앙의 한 형태이다.

 

매년 봄가을 정기적 당굿 날이 잡히면 최영장군당에 고하고 굿 준비에 들어간다. 굿을 할 선ㆍ후배 무당과 유명 잽이를 부르고 여러 사람에게 알려 많은 사람이 굿에 참관토록 한다. 또한, 최영 장군님과 여타 신령 물건들을 새롭게 장만하기도 하고, 신복을 새롭게 꾸미기도 한다.

 

새롭게 강림한 외임성수(조상신이나 몸주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 온 신령)가 들어오면 새로운 신도를 꾸미기도 한다. 진설할 굿 음식 또는 굿에 쓸 물건을 장만할 때는 가장 좋은 것을 고르되 흥정하지 않고 장만한다. 제물과 음식은 장군님 전께 풍성하게 올리고 참여자들도 흡족하게 먹고 남도록 준비하여 굿이 끝난 후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