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황해도 굿으로 치러지는 최영장군당굿은 굿이 드는 날, 묵는 날 그리 나는 날 등 모두 삼일굿으로 치룬다. 그리고 당굿은 소굿과 육굿으로 이원화된다. 드는 날부터 묵는 날 오전까지를 소찬(素饌)을 받는 신령을 모시고 소(素)굿을 치루며, 묵는 날 오후부터 나는 날까지 육찬(肉饌)을 받는 신령을 모시고 육(肉)굿을 한다. 그 절차는 신청울림 - 당맞이 - 일월맞이 - 상산맞이 - 초부정거리 - 감흥거리 - 소대감거리 - 성주거리 - 칠성, 제석거리 - 별상거리 - 영정거리 - 말명거리 - 군웅거리(사냥거리 포함) - 타살거리 - 대감거리 - 먼산장군거리 - 토일성수거리 - 신장거리 - 최영장군거리(작두거리 포함) - 대신거리 - 창부거리 - 조상거리 - 목신서낭거리 - 마당거리 등 모두 스믈네거리이다. 1. 신청울림 신청(神廳)은 신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굿을 거행하는 의례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을 굿청이라고도 부른다. 신들을 신청으로 모시기 위해 쇳소리와 북소리를 내는데 이는 울림(소리)을 내어 천지의 신령 세계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이때, 쇳소리 가죽소리를 내어 신청에 떠도는 해롭고 좋지 못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서경욱은 1957년 6월 7일 경기도 이천군 모가면에서 아버지 서기득과 어머니 안임영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셋, 언니 하나, 아래로 남동생이 있다. 키 153cm, 체중 48kg 정도의 체구가 단아하고 피부는 흰 편이며 미인형으로써 눈이 크고 귀염성 있는 형이다. 그녀의 할머니가 신기(神氣)가 있었다고 하지만 신을 모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경욱은 태어나자마자 몸이 몹시 약한 탓에 부모가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부모는 아기가 죽은 줄 알고 이불로 싸놓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시름에 잠긴 어머니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이불을 펼쳐보니 아기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면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태어난 지 1년 뒤인 1958년 6월 30일에야 비로소 출생신고를 하였다. 7살 되던 해 우연히 지나가던 스님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절로 데려가려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몹시 아파 학교를 거의 앓으면서 다녔다. 17살 되던 해 원인 모를 병으로 3달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거동을 못 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밥은 물론 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편, 장군신앙이란 살아생전 영웅시되었던 장군의 영혼이 사후에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것을 말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충절을 다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거나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장군이 죽은 뒤 특정인이나 또는 마을 신당에 봉안되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수호하는 장군신으로 봉안되는 것이 장군신앙의 한 면이다. 이와 같은 장군신앙 원리를 바탕으로 최영장군신은 말한 바와 같이 무속신앙에서는 물론이고 마을신앙에서나 민중들의 설화을 통해서도 한민족 역사의 위대한 영웅으로 그리고 영험한 신격으로 되살아 있다. 그러한 것은 민중들에 의해 전승되어온 최영장군신앙 관련의 설화를 보면 그러한 측면을 엿볼 수가 있다. 설화에서는 최영장군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최영 장군은 민중들에게 그 자체가 신이한 신격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곧, 민중들로부터 묘사되고 있는 최영 장군은 초월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목을 마음대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인 능력은 다른 장군설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최영 장군이 민중들에게 신격화된 배경에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1. 최영(崔瑩)의 생애 최영(崔瑩)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실려 있다. 근래에는 고려사 및 관련 사료들을 기반으로 최영의 출생 배경을 비롯한 성장기, 인간상, 애국심, 공적 등 생애 전반에 걸친 연구가 김상기, 「최영(崔瑩)」, 《조선명인전》 1939; 민병하, 「최영(崔瑩)」, 《한국의 인간상 2》 1965; 민병하, 「최영(崔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출세, 「최영 견금 여석의 일생」, 《동악어문연구》 33 1998; 유창규, 「고려 말 최영 세력의 형성과 요동공략」, 《역사학보》 143 1994; 김병섭, 《고려명장 최영의 역사 흔적을 찾아서》 2007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영(崔瑩)은 고려 충숙왕 3년(1316년)에 태어나 고려 우왕 14년(1388년) 12월 만 72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본관은 고려의 대표적 20개 문벌 중 하나였던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이며, 고려개국 공신 최준웅(崔俊邕)을 시조로 삼고 일천 년이 넘도록 대를 이어온 융성한 가문이다. 동주 최씨 후손인 최영은 고려 청백리 평장사(平章事) 유청(惟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황해도 해주 본영 대동굿은 탈굿이라고 할 만큼 광대놀음이 중요하다. 광대를 놀려야만 마을의 돌림병을 막고 가가호호 좋지 못한 해로운 액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군굿에서 작두를 타고 내려온 뒤, 곧이어 시작되는 광대굿은 남녀광대가 마당에서 한삼을 뿌리고 광대춤을 추면서 거하게 한바탕 논다. 이어, 원광대가 만세받이를 하고 공수를 내린 뒤 상장구 갖은 재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을 사람 모두의 입설, 구설과 열두 도액을 막아내는 덕담타령도 한다. 또다시 광대춤을 추고 익살스러운 짓거리와 줄타기를 하면서 흥겹게 논다. 광대굿을 마무리할 때는 원광대가 날만세(빠른 장단으로 된 만세받이. 만세받이는 신을 청하는 청배무가의 하나)를 한다. 광대굿의 만세받이, 공수, 재담, 덕담타령, 날만세 등은 다음과 같다. <만세받이> 모여랴오 모여랴오 광대탈대감 모여랴오 해원단년 00년에 달에 월색은 00상달 날에나 천문은 00날이요 고을로는 황해도땅 해주하고도 00동에 일월이영천 대령할 때 광대대감이 노사니다 내광대 본영은 광대산 줄바위 광대로다 외줄을 타신 광대씨요 쌍줄을 타시던 광대씨라 남광대 여광대 구어비 남성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해주 본영 대동굿은 24거리 짜여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청울림 마당과 신청 내부에 상을 차려 놓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배례하면서 바깥 부정과 안 부정을 쳐서 좋지 못한 해로운 기운을 걷어 낸다. 그러면서 모든 신령에게 굿 시작을 알린다. 2) 상산맞이굿 (일명 당산맞이굿) 경관만신(황해도 굿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만신)이 홍의대와 홍갓을 쓰고 상산상(上山床, 上山 방향으로 차려 둔 산을 의미하는 상)을 차려 놓고서 사방을 돌며 배례한다. 상산신, 본산신, 상산부군, 서낭, 팔도명산신 등을 맞이 하고, 광대산(廣大山 )의 남녀광대신도 맞이하여 굿청에 좌정시킨다. 제금(자바라)으로 산천문(山川門, 산과 천[바다]의 세계를 여는 문)을 열고 명(命)쇠 복(福)쇠 곧 쇳소리로서 명과 복을 맞이하는 쇠열이 타령을 한다. 3) 세경돌기 마을의 공공기관과 상점 그리고 가가호호를 돌며 곳곳을 정화시키고 대동굿을 알린다. 이때 각 집에서는 대문 앞에 꽃반(지신밟기를 할 때 차리는 고사 상)을 내놓는다. 꽃반 차림은 실타래를 감은 숟가락 두 개를 쌀이 수북이 담긴 모말(곡식을 되는, 네 모가 반듯한 말) 또는, 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지금까지 밝혀진 황해도 해주 본영 대동굿 전승 계보는 다음과 같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10살부터 해주 옹진 일대를 중심으로 무업을 하였던 나랏만신 김기백(남, 1893-1944) 박수가 유명하다. 황해도 만신들 사이에 신화 같은 존재로 명성을 떨쳤던 김기백 박수는 본영 대동굿을 신아버지 강박수(남, 1843-1910) 그리고 두 번째 스승으로 모시게 된 신어머니 권 씨로부터 배웠다. 권 씨 만신은 키도 크고 눈도 호랑이같이 커서 일명 ‘호랑이 권 씨’라는 별호를 갖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굿 문서를 익힌 김기백 굿문서는 그의 제자 우옥주(여, 1920-1993)와 박선옥(여, 1932-2005) 만신에게 이어졌다. 이후, 우옥주 만신은 만구대탁굿 전승에 심혈을 기울였고, 해주 본영 대동굿은 박선옥 만신은 대동굿에 전념하였다. 인천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던 해주 본영 대동굿은 박선옥의 제자 김정숙(여, 1954년생)에게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큰무당 박선옥은 한국동란 때 인천으로 월남한 뒤 황해도굿을 널리 전승시켰던 큰 만신이었다. 인천 석바위에 살았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석바위 만신이라고 불렀다. 2005년 박선옥
[우리문화신문=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황해도 해주 본영 대동굿은 광대신을 모시고 마을 돌림병을 막아내고 마을 사람의 안녕 그리고 대동단결을 모색하기 위해 치러지는 마을굿이다. 대동굿을 거스르면 심술궂은 광대신이 해코지를 하므로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광대신 모시기를 깍듯이 해 왔다. 이에 대한 회고담을 해주 본영 대동굿 전승자 박선옥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본영에는 사람들 왕래가 잦아 마을 장터에서는 남녀 유별함이 훼손되고 부녀자의 불륜이 일어나는 좋지 못한 일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특히 근친상간인 상피붙음 같은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마을 원로가 유명 선관 도사를 찾아가 물었다. 도사는 광대산에 사당을 지어서 광대신을 봉안하고 극진히 대접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남녀 두 사람을 탈광대로 분장시켜 모의 연애를 하면 마을의 불길한 일을 막아 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선관 도사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광대산에 사당을 지어 광대신을 모셨다. 그리고 대동굿을 할 때면 광대신을 강림시켜 광대굿을 펼쳤다. 그 뒤로 마을이 평안하고 불길한 일이 없어졌다. 이와 같은 사실이 순식간에 여러 마을로 퍼져나갔고, 해주 옹진 일대의 대동굿에서는 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우옥주(禹玉珠, 본명 李順愛, 여)는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서 경신년(庚申年)인 음력 1920년 11월 17일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우 씨 할아버지는 고위 관직에 올랐고 증조부는 한의로 명성을 떨쳤다. 끝까지 가르쳐 보자는 어른들 욕심에 우옥주는 어린나이 6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여고 2학년 때인 17살 때 갑자기 마를 때로 마르면서 폐병 3기에 들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석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즈음 집안에 갑자기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 내리던 여름날 밤, 느닷없이 힘이 솟구친 우옥주는 옹진 진수대로 나가 죽은 송장을 파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집에서는 신이 들려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끝까지 무당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무당 될 거면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칼이라도 물고 죽으라는 전주 이씨 가문의 저주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단양 우씨로 바꿨다. 그리고 무당이 되었고 병은 낳았다. 이때부터 이순애는 성과 이름을 갈아 우옥주가 되었고 나이 또한 다섯 살이나 늦도록 호적이 만들어졌다. 오갈 데 없는 우옥주는 최일리 만신을 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만구대탁굿은 족보 있는 무당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그 중심에는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옹진읍 개울몰[堂峴里]로 들어와 살았던 김기백(남, 1893-1944) 나랏무당이 있다. 월남한 실향민들에게 전설적 무당으로 알려진 김기백은 1981년 한국일보가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 연재에서 조선 무당으로 소개돼 그의 생애 일부가 세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최성자, 「한국서민열전(國庶民列傳):격동의 근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들-조선 무당 김기백(28)」, 한국일보 , 1981년 8월 2일) 곱상한 외모와 가는 몸매의 체형을 가진 김기백은 겉으론 보기엔 왜소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적으로는 강한 의기와 투철한 애국심을 가졌던 조선 무당이었다. 옹진으로 이주한 어린 시절의 김기백은 아버지와 함께 만석꾼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14살 되던 해, 소 풀을 먹이러 나갔다가 바위에 걸려 뒤로 넘어져 기절하였다 깨어난 뒤부터 유식하고 영험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주위에서 신이 내린 것 같다고 하였지만 김기백의 아버지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할망정 광산 김씨 집안 망신은 안 된다며 아들의 신내림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