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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LA에서 처음으로 우리 국악을 방송하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508]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 이야기는 김동석이 오래전부터 미국의 교사들을 위한 한국문화 강좌(Korean History and Culture Seminar for American Educator) 시리즈를 계속해 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LA 교육국에서 한국음악을 교육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LA지역에서 처음으로 국악방송을 시작한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김동석이 UCLA으로 유학을 떠난 해는 1971년도이니 올해로 꼭 50주년이 된다. 그때를 회고하는 그의 말이다.

 

“당시 이곳의 한인 인구는 1만 명도 안 되었지요. 지금처럼 번듯한 한국식품점도 없어서 거의 모두가 미국인이나 일본인 마켓을 이용하고 있었고, 한인교회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이었으며 당시 한국어 방송을 들을 기회는 없었어요. 다만 <한국일보> 미주 지사가 유일하게 교포들에게 고국의 소식과 한인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유일한 미디어였으니까요. 그 뒤, 이민 조건이 완화되어 한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가 오게 되면서 코리아타운이 기존의 크렌셔 지역에서 지금의 올림픽가로 조금씩 이동하게 되었지요. 올림픽 거리에 한국식품점과 올림픽 마켓이 열리게 되었고, 주위에 한국식당이나 한국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열면서 점차 한인 타운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1974년에는 처음으로 코리안 퍼레이드(한국의 날)가 올림픽 길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모든 한국인의 행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방송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한인을 상대로 하는 유선방송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 유선방송 주파수에 맞춘 라디오를 사면 한국말로 나오는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데, 주로 한국 가요라든가, 간단한 지역 소식, 등을 전하는 방송이었어요. 나는 이 유선방송에서 하루 30분 정도 우리 국악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요. 공중파 방송은 아니지만, 유선방송이나마 우리 교포들에게 국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기회를 얻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한 2년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1989년인가 <라디오 코리아>란 이름으로 한국어 공중파 방송이 시작되었어요. 미국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살던 남가주 지역 50만 교포 사회를 위한 뉴스, 정보 및 오락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는데, 나는 “김동석의 우리가락 좋을시고”란 프로그램으로 국악방송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는 국악방송을 처음으로 요청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민 1세들로부터 3세, 4세, 더 나가서는 이민 5세까지 함께 살고있는 지역 사회이기에 한국어를 이해하는 정도도 각기 달라 소통이 어렵다는 점과 특히 국악의 경우, 더더욱 차이를 보이는 세대 간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은 국내에서도 다를 바 없다. 아직도 국악은 느리고, 어렵고, 지루하고, 따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비호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면서 저절로 상황이 바뀌기만을 기대하는 것도 잘못이다. 글쓴이의 평소 주장대로 이러한 상황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바꿔 나가야 한다. 이점이 미국 땅에서 국악방송을 하게 된 그에게도 고심거리였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되고도 남는다.

 

그의 고민이 이어진다.

 

“그래서 단순하게 음악 틀어주고, 제목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어요. 때와 절기를 맞추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장르별로 해설하고 음악을 소개하는 방식이었지요. 예를 들어 시조를 소개한다면, 6월의 <아버지날>과 관련지어 부성애에 관한 얘기, 곧 황제펭귄의 목숨을 건 새끼 사랑 얘기를 통해서 시조 가락과 함께 소개하지요. 또한, 이민생활의 어려움이나 자녀 교육의 문제와 연결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해도, 서로 돕고 견디어 나가자는 취지로 희망찬 우리 민요 한 곡을 곁들여 내보내면 청취자들은 국악방송을 듣는 1~2시간이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받는 시간이었다고 응답을 해오는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나는 의례적으로 명창 박동진의 판소리 <예수전>을 몇 년 동안 방송하였지요. 많은 청취자는 이구동성으로 이 성경 얘기를 판소리로 들으니 예수님이 한국의 시골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것 같은 친근감이 생겨 성경 얘기가 맘에 와 닫는다는 얘기가 방송국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 글쓴이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초대 손님으로 참여해 김동석과 함께 방송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의 방송국 시설이나 환경은 매우 열악한 편이어서 놀랬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방송한다면, 연출자를 비롯하여 아나운서, 기술진 등, 4~5명이 참여하지만, 그곳의 방송 진행자들은 스스로가 제작하고, 기계도 혼자 조작하고, 그야말로 일인다역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국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스스로 담당하기 힘든 일이 또한 방송하는 일이라는 점을 느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