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전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작가 김서울이 이야기하는 전통과 유물, 박물관 - 《뮤지엄 서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뮤지엄 서울》. 이 제목을 본 독자는 서울에 있는 박물관을 소개하는 책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목에 쓰인 서울은 작가의 필명 ‘김서울’에서 따 온 것으로, 작가 (김)서울이 자신만의 재미있는 시각과 솔직담백한 문체로 전통과 유물, 박물관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2019년 텀블벅 「시리즈 오브 시리즈」 프로젝트의 하나로 9월부터 10월까지 매주 1회씩 글을 연재했고, 당시 ‘한국 문화유산 큐레이팅’이라는 소개 문구와 함께 연재했던 글을 보완하고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책은 ‘흐르는 시간’, ‘유물에 담긴 시간’, ‘미래의 박물관’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흐르는 시간’에서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의 전통, 곧 ‘흐르는 전통’을 다루고 있다. 흔히 ‘전통’이라고 하면 현재와는 단절된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전통’의 ‘전’은 ‘앞 전(前)’이 아니라 ‘전할 전(傳)’이며, ‘통’ 역시 ‘계통 통(統)’으로 두 글자 모두 이어진다는 뜻이 있음을 일깨운다. 그것은 곧,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전통의 일부이며 전통은 매 순간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가령, 책에서 ‘흐르는 전통’의 예시로 들고 있는 당초문(넝쿨무늬)은 원래 이집트에서 유래하여 전 세계에서 쓰이는 무늬다. 오늘날에도 아파트 담 장식이나 화장실 타일, 노트나 다이어리 디자인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초문은 삼국시대부터 쓰인 이래, 고려와 조선에서도 때론 화려하게, 때론 단순하게 변화를 거듭하며 이어져 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문화 예술의 발전은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온갖 것을 실험해 보면서 발전시키는 발산기가 있고, 그 가운데 가장 균형 잡힌 조형성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해 발전시키는 수렴기가 있다. 그리고 다시 수렴된 것들을 뛰어넘기 위한 기상천외한 실험들이 발산된다. 이렇게 발산과 수렴을 반복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 문화라면, 지금 당초문은 어느 단계쯤 와 있을까? 저자는 ‘당초문’과 같은 익숙한 무늬를 소재 삼아 앞으로 사람들의 미감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제안한다.

 

2부 ‘유물에 담긴 시간’은 하나의 예술작품이 유물이 되는 과정을 회화 유물과 석조 유물로 나누어 풀어낸다. 평소 한국화가 궁금했던 독자라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만한 부분이 많다. 한국화를 그리는 과정뿐만 아니라 습기, 벌레, 화재 등으로 훼손되는 과정도 상세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회화에 관한 간단한 배경지식만 갖추고 있어도 박물관 서화실에서 훨씬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며, 유물의 현재 모습을 보고 유물이 겪었을 고초를 추리해보는 것도 즐거운 놀이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석조유물 부분에서는 무령왕릉 지석에 대한 저자의 푸념이 공감을 자아낸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돌판의 뒷면에는 왕 부부가 땅의 신에게 거금을 주고 이 땅을 정당히 쓴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여기서 백제 왕 부부의 경제력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요즘 같은 때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땅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물론 실제로 땅의 신에게 돈을 주고 서명날인하고 계약서를 주고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은 이들이 저승에 가서 토지 문제로 탈이 없도록 땅의 신에게 돈을 주고 이 땅을 정당히 샀다고, 말하자면 그들이 앞으로 내내 평안할 수 있게끔 생자들이 기도를 올린 것이다. 우리네 장례 풍습에 죽은 이의 평안을 위해 사후 먼 길 떠나며 노잣돈 하라며 관에 돈을 넣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만 평범한 우리들과 백제의 왕 부부 사이에 자산 규모 차이가 있다 보니, 우리는 푼돈인 노잣돈을 건네지만, 무령왕 부부는 거금을 주고 땅을 샀다. 현재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부동산 문제로 골머리 앓는 일이 잦다는 걸 생각하면 천 년도 더 지난 옛날에 살던 임금 부부의 경제력에 어쩐지 박탈감이 조금 느껴지기도 한다. (P.143)

 

3부 ‘미래의 박물관’에서는 대한제국 시절 창경궁 ‘제실박물관’부터 1910년 일제 침탈 이후의 ‘이왕가미술관’, 2005년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까지 한국 박물관의 역사를 살펴보고 미래의 박물관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초기 박물관 시기에는 보존 과학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아 많은 출토물이 발굴 뒤 간단히 세척되어 그대로 전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왕가미술관 시기의 전시실 사진을 보면 지금과 비교해 상당히 단순한 모습이다.

 

 

또,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 훗날 박물관에 전혀 엉뚱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가령, 일본 한신타이거즈 휴대전화 장식이 일본 한신 지역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호랑이 숭배 사상이 표현된 휴대용 종교 의례품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오늘날 ‘신라시대 귀걸이 장식’이라고 알고 있는 유물이 어쩌면 귀걸이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다.

 

이 굵은 귀걸이를 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귀에 걸었을까? 굵은 고리 부분은 속이 비어있어 무게는 보기보다 무겁지 않다. 귀걸이가 맞긴 하겠지? 혹시 먼 훗날 4000년대 인류가 내가 중, 고등학교 때 사용하던 핸드폰 고리를 귀걸이라고 착각하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아닐까? (p.200)

 

 

저자와 함께 박물관을 둘러싼 시간과 유물을 종횡무진하다 보면 어느새 책장을 덮을 시간이다. 작은 판형에 글자도 많지 않아 전통에 대해 가볍게 수다를 떤 느낌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은 너무 적게 얘기되고 있다. 전통을 얘기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진다. 전통에는 ‘고증’을 거쳐 도출된 ‘정답’이 있고, 그래서 사실 확인(팩트체크)을 먼저 하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냥 정답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린 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얘기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전통에 대해 너무 정해진 답변을 외워왔던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나 책, 음식을 말하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전통도 부담 없이 얘기할 수 있는 문화, 자신이 좋아하는 유물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일상도 하나의 ‘전통’이 되어 오래오래 이어지면 좋겠다. 전통은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니, 점점 많은 사람이 전통을 얘기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이 또한 하나의 멋진 ‘전통문화’가 되지 않을까.

 

《뮤지엄 서울》, 김서울 지음, 호미와 낫, 15,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