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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학살당하는 자의 눈빛

《한 가족의 삶에 드리운 100년 동안의 폭풍우》, 김영란(저자), 김영수(역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80]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 사진 보신 분들 많으시겠지요? 미 육군 소령 로버트 압보트(Robert Aborr)가 1950년 7월 무렵 대전 인근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100년 동안의 폭풍우》에도 이 사진이 실렸습니다. 저자 김영란 선생은 보도연맹원 학살을 얘기하면서 이 사진을 책에 실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한때 좌익이었던 사람들도 전향하면 자유대한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겠다며 보도연맹을 만들었었지요.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니까, 이들이 위험인물이라며 즉결처형 하도록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는지 정확한 숫자도 알 수 없는데, 적게는 10만 명 많게는 3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두 발이 붙잡혀 엎드려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움찔한 것입니다. 학살되어 구덩이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처럼 저 사람도 사진이 찍힌 지 얼마 안 되어 학살되었을 것입니다. 죽기 직전에 애처롭게 쳐다보는 눈길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쳐집니다. 저 사람은 누굴까? 시신은 제대로 찾기나 했을까?

 

아무리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이라지만 잘잘못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학살입니다.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도 올해까지 4차례에 걸쳐 집단학살 현장이 발굴되었지요? 골령골 학살 현장은 30m에서 180m에 이르는 각각의 구덩이 8곳을 연결하면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하지요. 골령골에서는 지금까지 1,250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지만, 아직 6천여 구의 유해가 더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이런 학살의 현장은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학살의 현장이 더 많을 것입니다. 학살의 현장 가운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 해에 몇백만의 사람이 방문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유명한 학살현장이 있나?”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지만 학살현장이라는 의식도 없이 그곳을 지나갑니다. 어디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바로 제주공항입니다. 4.3항쟁 때 제주공항(예전 정뜨르비행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살된 유해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위를 활주로로 덮어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금도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 밑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시신들이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수열 시인은 시 <정뜨르 비행장> 첫 연을 이렇게 시작하지요.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을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직

 

김영란 선생은 《100년 동안의 폭풍우》에서 도날드 니콜스의 자서전 《나는 몇 번이나 죽을 수 있을까?》에 나오는 니콜스의 고백 일부분도 인용합니다. 니콜스는 해방공간 한국에서 활동한 미 정보요원인데, ‘아라비아 로렌스’에 빗대어 ‘코리아의 로렌스’라 불리던 사람입니다. 니콜스는 북한의 남침 계획을 그 시행날짜까지 알아내어 상부에 보고하였는데, 묵살되었다고 하지요. 니콜스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1,800명의 죄수가 조직적으로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일을 눈앞에서 보면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저 모든 일의 진행과정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 도랑 모양으로 무덤을 길게 파고 있었다. 트럭들이 와서 저주받은 인간들, 공산주의자들을 줄줄이 내려놓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등 뒤로 묶여있었다. 그들은 이내 파놓은 도랑 쪽으로 이동되어 세워졌다. 그리곤 이내 머리에 총알을 맞고 파놓은 무덤 안으로 떨어졌다.

 

나는 처음에는 이를 말리려 했으나 급한 남행길에 시간을 그곳에서 허비할 수 없어 이내 포기했다. 나는 현장에 있던 오직 한 명의 외국인이었다. 당시에 만일 내가 그들 죽은 자들과 함께 빠르고 쉽게 생을 마감하였더라면 그 뒤 밤마다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니콜스는 자신은 단순한 목격자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동안 그의 어두운 행적으로 보아 ‘그가 과연 단순 목격자였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여간 《100년 동안의 폭풍우》를 읽으면서, ‘해방공간과 6.25 전쟁 중에 좌와 우가 서로를 증오하여 사람을 죽이면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극좌와 극우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격한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다시 전과 같은 혼란의 상황이 돌아온다면? 그러면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킬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아! 이 역겨운 이념 갈등! 우린 언제나 이 더러운 이념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