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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 섬긴 허조

몸집이 작고 등이 구부러진 장애도 극복해 꼿꼿이 살다
[‘세종의 길’ 함께 걷기 88]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허조 : 예악(禮樂)제도와 올곧음

 

세종 시대의 인사들을 살피고 있다. 허조(許稠, 1369~1439)는 조선 초 문신으로 태조ㆍ정종ㆍ태종ㆍ세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제도를 정비하였다.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데, 나이 17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9살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배웠다.

 

생애

 

· 1383년(우왕 9) : 진사시에 우왕 1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공양왕 2년(1390)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 태조 6년(1397) : 석전(釋奠, 문묘-文廟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6품 관직)로서 지제교(조선시대 임금이 내리는 교서의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직)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 종5품 관직)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사헌부 종3품 관직)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원나라의 관학으로 자리 잡게 하고 성리설이 큰 공헌하게 함)에게 제향하고 양웅(揚雄, 한나라 사람으로 왕망-王莽이 정권을 찬탈한 뒤 새 정권을 찬미하는 문장을 썼고 괴뢰정권에 협조하였기 때문에, 지조가 없는 사람으로 송학-宋學 이후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함)을 몰아내었다.

 

· 태종 2년(1402) :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이조정랑 등에 오름.

 

· 태종 7년(1407) :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세자시강원에 있던 정5품직)을 겸임하였다.

 

· 태종 11년(1411) :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유교의 예제를 담당했던 특별기구) 제조(각 사(司)나 청(廳)의 우두머리가 아니면서 각 관아의 일을 다스리던 벼슬)를 겸임하였다. 이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 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ㆍ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ㆍ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임금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 태종 15년(1415) 한성부윤ㆍ예문관제학, 태종 16년 예조참판ㆍ제조.

 

· 태종 18년(1418) : 개성유후사유후ㆍ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예조판서가 되어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 시행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부민고소금지법은 현대 용어로 백성의 인권에 관계된 복잡한 문제인데 ‘수령의 죄를 백성이 고발할 수 있느냐’로 모든 경우에 관원ㆍ관찰사ㆍ수령에 대한 고소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비리ㆍ불법행위ㆍ오판 등으로 인해 원통하고 억울한 일[소원,訴寃]을 당한 당사자는 서울은 주장관(主掌官), 지방은 관찰사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 세종 4년(1422) 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신속육전(新續六典)》의 펴냄에 참가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 관부에서 일정한 수의 관리들을 전문인력화하여 장기근무시키던 제도)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續六典)》의 펴냄에도 참가하였다.

 

· 세종 8년(1426)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 세종 10년(1428) :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 세종 17년(1435) :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이품 벼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수사적 기교에 중점을 둔 장식적인 문학론)보다는 강경(講經, 과시-科試에서 경서 가운데 어느 구절을 지정하여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외는 배송-背誦하고 강해하게 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처지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시가(詩歌)와 문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 세종 20년(1438) :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을 지냈다.

 

이듬해 궤장(几杖,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几와 지팡이)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춘추관에 두었던 정1품 관직)에 올랐으나, 그해에 생을 마쳤다.

 

 

 

허조의 몇 가지 이야기

 

허조는 꼿꼿이 살았기에 몇 가지 일화가 따라다닌다.

 

세종이 종묘의 춘향대제(이른 봄에 종묘ㆍ사직에 지내는 큰 제사)가 광효전 별제와 함께 예에 어긋나지 않아 기뻐하고 있는데, ... 임금이 음복위(飮福位)에 나아가 폐백 바치고, 찬작관(瓚爵官, 술을 따르며 잔을 건네주는 관리) 이조 판서 허조가 잔을 드리고서 물러 나오다가, 잘못 실족하여 계폐(階陛) 아래로 떨어졌다가 곧 다시 일어나서 계폐 위로 올라가서 빈 잔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도로 재전으로 들어가서, "이조 판서가 상하지나 않았느냐."라고 물으므로, 허조가 나아가서 실례됨을 사과하니, "계단을 넓히도록 하라."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7/1/14)

 

세종의 여유가 보이는 대목이다. 신하를 위로하는 것 이상으로 근본 원인을 거치도록 했다. 다른 하나의 기록도 보인다.

 

뒤에 은문(恩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시관-試官을 가리켜 일컫는 말)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는데, 문생(門生)과 옛 부하이던 아전[故吏]들이 감히 가 보는 이가 없었는데, 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 (《세종실록》 21/12/28)

 

허조의 꼿꼿함은 소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소신은 생전 이런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임금이 불러 일을 의논하다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경이 사사로 좋아하는 자를 임용한다고 하더라."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 말과 같사옵니다. 만일 그 사람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라면,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신이 피하지 아니하고, 만일 그 사람이 어리석다면, 신이 어찌 감히 하늘의 이치를 가져다가 외람되게 사사로 친한 자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1/12/28)

 

허조의 당당함이 보인다. 더불어 다음 이야기도 허조의 강단을 증명하고 있다.

 

조(稠)가, 대간(臺諫)이 꾸지람을 당하면 반드시 진력(盡力)하여 구원하며 말하기를,

"언관(言官)을 설치한 것은 장차 임금에게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조상을 캐려 함이었는데, 비록 혹시 잘못이 있다 하여도 어찌 급하게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종실록》 21/12/28)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 허조는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ㆍ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세종 20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승진되었고, 세종 21년 6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어 10월에 병이 드니,... 조(稠)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의원(醫員)을 보아서 무엇할까." 하고, 또 말하기를,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天地間)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하였다. 이날에 조(稠)의 형(兄) 허주(許周)가 들어와 보니, 조(稠)가 흔연히 웃고, 그 아내가 들어와 보아도 역시 그러하였다. (《세종실록》 21/12/28)

 

허조의 진심이 눈에 보일 정도다. 허조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장애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해나갔다.

 

성품은 순진하고 조심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세종실록》 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