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8 (월)

  • 흐림동두천 27.7℃
  • 흐림강릉 31.2℃
  • 흐림서울 28.3℃
  • 흐림대전 27.7℃
  • 구름많음대구 27.6℃
  • 구름많음울산 28.6℃
  • 구름많음광주 27.9℃
  • 구름많음부산 27.5℃
  • 구름많음고창 28.1℃
  • 구름조금제주 28.8℃
  • 흐림강화 27.5℃
  • 흐림보은 25.0℃
  • 구름많음금산 26.1℃
  • 구름많음강진군 27.0℃
  • 구름많음경주시 26.6℃
  • 구름많음거제 27.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소헌(昭憲) 왕후의 수난과 세종의 처신

[‘세종의 길’ 함께 걷기 92]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주요한 인물의 한 분이 바로 부인 소헌 왕후다. 태조 4년(1395)에 출생하여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며,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으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태종 8년(1408)에 충녕군(忠寧君) 이도(李祹)와 가례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태종 18년(1418)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으로 봉해졌으며, 같은 해 9월에 세종이 즉위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수난상황

 

소헌 왕후는 어릴 때부터 정숙하고 총명하여 14살에 세종과 혼인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친정아버지인 심온이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하면서 친정집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대신들은 반역자의 딸도 궁궐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야단이었지만 세종은 자신의 아내 곧 왕비가 궁궐에서 내쫓길까 노심초사하였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沈泟)이 군국대사를 상왕(上王: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벼슬을 박탈하고 사사되었다.

 

이런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명을 내리기를, "심씨(沈氏)가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으니, 그 집안이 어찌 천인(賤人)에 속할 수 있겠느냐." 하여, 심인봉 등이 이로 말미암아 천인이 됨을 면하고 양민(良民)이 되었다. 명을 내리기를, "심온의 아내와 네 명의 어린 딸을 천인에 속하게 할 때는 임금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라고 하였다.(《세종실록》 즉위년/11/26)

 

사정이 이러한데 부왕 태종은 장인의 죽음에 대해 혹시라도 세종이 자기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상을 오게 하라. 달이 밝으니, 주상과 함께 술을 마시며 밤새껏 놀고 싶구나.”라고 불렀다. 마음을 떠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내관을 보내어 세종을 연회장으로 불러들였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한 태종의 예상과는 달리, 밝은 표정으로 연회장에 들어와 술을 마셨고, 술기운이 돌자 일어나 춤까지 추었다. 그러나 이때 세종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 속마음은 울고 있지 않았을까. 이때 부왕 태종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태종이 정적들을 제거하는 그 결단과 용기에 어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세종은 그럼에도 혹시라도 태종이 소헌 왕후까지 내치지 않도록 인내하고 있었다.

 

장모안 씨의 일은 세종이 부왕 태종이 죽고서도 시간이 지난 뒤에 해결해 나갔다. 일부 신료와 여론의 반대를 고려한 듯 서서히 해결해 나간 것이다.

 

(대언 등에게 공비의 어머니 안 씨 일에 관해 말하다.) 임금이 조용히 이르기를, "무술년(戊戌年)에 강상인(姜尙仁) 등의 공사(供辭,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말)가 심온(沈溫)에게 관련되어 옥사가 이루어지니, 태종께서는 스스로 죽게 명하셨다. 의금부에서 연좌된 심온의 아우와 형인 심징(沈澄)ㆍ인봉(仁鳳) 등을 관노비로 삼도록 청하니, 태종께서 말씀하기를, ‘왕비의 백부와 숙부를 이렇게 처단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의금부에서 또다시 ‘죄인의 처자는 연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심온의 아내와 자녀를 천한 사람에 기록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옳지 않다.’라고 하시면서, 이내 박은(朴訔)에게 이르기를, ‘의금부에서 심온의 아내와 자녀를 천한 사람에 기록하기를 청하니, 이를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셨다. 박은이 대답하기를, ‘자기의 죄도 아니고 또한 중궁(中宮)의 어머니이므로, 다른 연좌의 예(例)와 다르니 잡아와서 관노비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그때 유정현이 의금부 제조가 되어 연좌시키기를 굳이 청하므로,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잠정적으로 천한 사람에 기록하겠지만, 그러나 천한 일은 시키지 말라. 뒷날에 마땅히 이를 고쳐야 할 것이다.’ 하셨다.

 

또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라고 하여, 공비(恭妃, 소헌왕후)를 흔들고자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어허, 그게 무슨 말인가.’ 태종께서 일찍이 한 방에 나와 있을 때 대비도 자리에 모시고 나도 곁에 있었다.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비의 어머니가 천안에 기록된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니, 모름지기 이를 고칠 것이다.’ 하셨고, 태종께서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천인에 속하게 된 것은 옳지 못하니 마땅히 이를 고쳐야 할 것이다.’ 하셨다. 내가 물러 나와 있으니, 태종께서 시녀에게 전하시기를, ‘공비(恭妃)의 어머니는 마땅히 천안에서 지워야 할 것이다.’ 하셨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 전에 태종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그 뒤에 나는 태종의 뜻을 상세히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태종 때에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까닭으로 내가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 8/5/19)

 

 

어머니 안 씨 방문

 

부왕 태종도 중전에 대해 벌을 주는 것에 찬동하지 않았으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비(恭妃)는 외할아버지 안천보(安天保)에게 자랐으며, 또 그가 늙었을 때는 죽고 삶을 알기 어려운 까닭으로, 갑진년 겨울에는 공비가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이에 대신을 불러 자식과 어머니의 사이에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는가를 의논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어머니는 비록 마땅히 보아야만 될 것이나, 왕비의 높은 몸으로 아래의 천인과 서로 보는 것은 의리에 통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 또 정부와 육조에서 올린 글이 있는데, 말하기를, ‘안씨(安氏)는 천안에서 지워야 하고, 작첩(爵牒, 벼슬아치에 대한 임명장)을 돌려주고, 그 자녀들도 모두 천인을 면해야 할 것입니다.’ 하므로, 내가 이에 윤허했으니, 경 등도 그리 알라. 더구나,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 보지 못한 것이 지금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어찌 박절한 정리가 없겠는가. 이러므로 오는 6월 초하루에 공비(恭妃)를 안씨(安氏)의 집으로 가게 할 터이니, 모두 이를 알라." 하였다.(《세종실록 》 8/5/19)

 

(1426년 공비가 어머니 안씨 집에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다.) 공비(恭妃)가 어머니 안씨(安氏) 집에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고, 유시(酉時)에 궁궐로 돌아왔다.(《세종실록》 8/6/4)

 

심온이 처결된 것은 세종 즉위년의 일이고 중전이 어머니 집에 행차케 하여 연회를 베풀게 한 것은 8년의 일이니 긴 시간 인내하며 부왕 태종을 이해하려 했으며 세종 스스로 정치에 자기 방식을 이루기 전까지는 서둘러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후 실록에 거듭 나온다.

 

(심온의 문제를 신중히 처리하라고 명하다.) 의정부에서 계하기를, "심온이 비록 강상인(姜尙仁) 등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어 잡히어서 죄를 받았사오나, 태종께서 특히 자진(自盡)하라는 처분을 내리시고, 또 이양달(李陽達)에게 명하사 자리를 택하여 곤장을 맞아 죽게 하라고 하셨사오니, 이는 대개 공비께서 지존의 배위(配位)가 되옵시고 세자[元良]를 낳아 기르신 까닭입니다. 더욱이 그때 심온은 죄목을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죽지 않았더라면 의당 고신도 돌려주고 죄적(罪籍)에서도 삭제되었을 것이온데, 〈태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셔서 미처 하교하시옵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비옵건대 온은 고신을 도로 내려 주시와 신 등의 소망을 위로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부왕(父王) 때의 일이므로 경솔히 논의할 수가 없다. 부왕께서 온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추국하지 않고 외방으로 유배하려고 하셨지마는, 그때 집사자(執事者) 한 사람이 국문을 굳이 청하므로 비로소 이를 허락하셨던 것인데, 온이 드디어 ‘병권[兵柄]은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에 승복하였고, 또 ‘이른바 한 곳이란 것은 어느 곳을 뜻하는 것이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 곳이란 곧 주상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였고, 또 병권이 ‘한 곳으로 돌아간 뒤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나도 무반(武班)이다. 병권을 장악해 보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온이 문초에 승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요, 그렇다고 반역(叛逆)한 신하가 아니니, 제경(諸卿)은 마땅히 의금부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이를 잘 살펴보라." 하였다.)(《세종실록》 11/3/16)

 

세종은 어디까지나 부왕 태종의 결정을 마음대로 바꾸지 않았다. 이런 결단이 세종의 특징을 보여주는 일인데 부왕이 없다고 하여 부왕이 결정한 일을 그 까닭을 마음속으로 승복할 때까지는 함부로 변경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세종 정치의 올곧음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지막 상황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소헌 왕후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삶을 마쳤다. 세종은 왕비가 중병에 걸렸을 때 왕자들에게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게 하고, 중죄인을 뺀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그래도 병이 낫지 않아 승려들에게 기도를 드리게 했다. 효자인 세자는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세종 28년(1446)은 훈민정음을 공식적으로 백성들에게 반포한 기념비적인 해지만 세종 개인에게는 무척 슬픈 한 해였다. 세종 26년(1444)에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이 죽었고, 그다음 해에 일곱째 아들인 평원 대군이 죽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부인인 소헌 왕후마저 다음 해인 세종 28년(1446)에 52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헌 왕후는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소헌왕후는 지금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에 세종과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