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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세종 때의 만능선수 김돈(金墩)

[‘세종의 길’ 함께 걷기 9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김돈(1385-우왕11~1440-세종22)은 세종시대의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과학자다. 세종을 보필한 인물로는 행정의 달인 영의정 황희. 정계의 음유시인 맹사성, 예조 판서 유관, 병조판서 조말생 그리고 국방의 김종서, 학문의 주춧돌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당대의 개성 넘치는 석학들이 있었다. 이런 석학들 속에 여러 분야에서 말하자면 만능선수로 세종을 보좌한 인물로 김돈이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태종 17년(1417) :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ㆍ좌승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1418년 8월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1년 전에 실시했던 식년시에서 김돈이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종은 김돈을 불러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반가워하며 김돈을 집현전 박사에 중용하고 이후 성균관 사성, 종학박사 등에 제수하였다. 충녕대군 시절 어릴 적부터 김돈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만나기를 기다렸는데 김돈이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계가 있을 때 권력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세종 2년 (1420) : 김돈을 일찍이 창설 인원으로 집현전 박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유관ㆍ변계량이 대제학이었다.

 

∙세종 5년 (1423) : 집현전 수찬이던 김돈에게 전라도에서 왜적 선박을 공격한 윤득홍을 포상하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다. 하필 김돈에게 지시를 내렸을까. 세종은 김돈을 생각하는 배려와 마음이 보인다. 바로 김돈의 모친이 전라도 강진에서 살고 있어서 효도의 기회를 배려한 것이었다. 이때 윤득홍에게 옷 한 벌과 술 160병을 내렸다

 

∙세종 6년(1424) : 경연에서 세종과 일식(日蝕)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다.

 

∙세종 10년(1428)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 송나라 때 성리학설을 집대성하여 편집한 유학서

)》 시강에서 김돈의 정밀한 학구열을 칭찬한다.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지어서 올리고, 종학박사(종친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의 박사)와 사성(성균관의 종삼품 벼)을 지냈다.

 

∙세종 11년(1429) : 형벌의 불가피함과 남용에 관해 논의하는데 세종과 김돈의 생각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경》에 ‘나로 하여금 하고자 하는 대로 다스리게 하여 사방이 바람이 움직이듯이 따르게 한다면 너의 아름다움이다’라고 한 구절에 이르러 말하기를 ‘형벌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고 말한 것은 형벌은 아름다운 일은 못 되는 것이지만 성인도 역시 능히 그만두지 못하신 바이다.' 하니 검토관 김돈이 대답하기를 ’형벌은 비록 없을 수 없는 것이나 또한 남용할 것도 못 되기 때문에 이 글 편에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 13년(1431) : 세종은 일할 수 있는 신하를 배려했다. 김돈의 나이 46살이던 해 김돈은 노모가 계신 고향 강진 인근으로 외직을 요청한다. 어머니가 78살이고 풍랭증을 앓고 있었다. 세종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10월 27일 장흥 도호부사에 제수하면서 형인 김진도 영암의 수령으로 발령하였다.

 

그러나 김돈은 장흥부사로 있으면서 수령육기제 기한(5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3년 만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과학자로서의 김돈을 활용하기 위해서였고 혼자만 부르면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수레까지 준비하여 노모를 서울로 모시게 하였다.

 

더불어 형도 임기가 차기 전에 서울에서 일하게 예조 정랑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를 ‘대궐 안팎과 문인들 사이에서 부러워했다’라고 사관들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 16년(1434) 집현전 직제학 김돈의 어머니에게 쌀ㆍ콩 등을 하사하여 그의 보양의 뜻을 다하게 했다. 또한 7월 진양대군(후에 세조)의 글씨본으로 하여 금속활자 갑인자를 주조하게 한다.

 

이해에 지중추원사 이천(李蕆)과 의논하여 ‘판을 만들고 주자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랍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라며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당시 직제학이던 김돈도 맡아 하게 했다.

 

이해 김돈은 정초, 정인지, 이천 등과 함께 천문기구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여 오목해시계 곧 앙부일구, 주야간 천체를 관측하여 시간을 알 수 있는 기기인 일성정시의, 간의, 소간의 현주일구, 천평일구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10월 2일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는데 김돈이 명(銘,사물의 내력을 새기는)을 지었다.

 

∙세종 16년(1434) :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해 임금에게 상소하고, 그 뒤 부승지가 되었다.

 

∙세종 17년(1435) : 김돈은 승정원의 우부승지가 된 이후로 세종 20년에 승정원의 도승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세종의 곁에서 임금의 뜻을 잘 펼 수 있게 사려깊고, 전략을 꾸미며, 조언을 하고, 친구이면서도 소통을 원만히 하도록 조력하였다.

 

∙세종 19년(1437) : 주야 측후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가 이룩되는데 김돈이 서(序, 일의 요지)와 명(銘, 공적 또는 사물의 내력을 새긴 글귀)을 짓게 했다.

 

천문 관측에 정통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 물시계)를 설치해 바퀴의 물로 돌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측정되는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 물시계에서 떨어지는 물)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또 한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과 사람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 물시계)를 설치해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세 신 곧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시간을 알릴 (참고: 하룻밤의 시간을 다섯 경-更으로 나누고, 한 경은 다섯 점-點으로 나눈다)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도록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했으며, 집현전 출신으로 박학다식하였다. 특히 과학 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아는 학자였다.

 

∙세종 20년 (1438): 공법의 시행여부에 대해 논의를 하는데 여러 논의 가운데 신개(申槪)가 ‘낙동강과 옥야도 경하고 중한 것을 고려해 조세를 거두어야 한다’라고 했듯이 ‘조금 썩은 곳은 답험(踏驗, 조세 등급 매기기) 할 수 없으니 신개의 의논을 좇는 것이 편하다’라고 아뢴다.

 

∙세종 21년(1439) : 세종은 경연에서 김돈에게 이르기를 ‘이미 세자(문종)가 이미 25살을 넘었으니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에 참여하여 결단할 수 있다고 한다. 김돈은 의례적으로 예부터 삼가온 일이라며 아뢴다. 세종은 ’너의 말이 옳다’고 하며 ‘그러나 1, 2년을 기다려 내 뜻을 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 세종 22년 6월 22일 :(도승지 김돈이 사직을 청하다.)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이 사직하여 말하기를, "신이 병세가 날로 깊어져서 음식 생각이 없고 머리와 눈이 어둡고, 어찔어찔하여 사지에 힘이 없어, 여러 달 정한 시간에 출근하지 못하여 자리를 비우고 일을 폐하였으니 신의 직사를 파하시기를 비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22년(1440) : 아쉽게도 김돈은 9월에 세상을 떠난다. 향년 56살이다.

 

 

세종을 측근에서 모시다

 

김돈은 23년 동안을 집현전 제학, 승정원 도승지로 가까운 곳에서 임금을 보필하였다. 김돈은 생애 마지막 6년을 세종의 최측근인 승정원에서 일했으며 도승지 곧 비서실장으로는 25달을 세종과 동고(同苦)했다.

 

김돈은 세종보다 열세 살 위였으나 행동에 절조와 염치가 있었다. 신하가 할 일까지 간섭하지 말며, 형벌은 없을 수 없으나 남용하지 말며 발언을 적게 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듣도록 간언하는 등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많이 진언했다. 또한 집현전 학자로서 천문에 정통하여 간의대를 비롯한 자격루, 보루각. 천추전에 창설한 흠경각과 옥루기, 일성정시의, 오목해시계 만드는데 함께 했으며, 갑인자 주조 등에 참여하여 세종 과학문화사에 이바지하였다.